여행

400차 의정부 신숙주 수락산 별내로 고교 바이콜릭스 라이딩

여추 2021. 4. 13. 20:48

4.10(일) 09:30, 고교 바이콜릭스 대원 7명이 의정부역에서 만나

코로나 덕분(?)에 주말 종교활동이 제한됨에 따라 3월부터 거의 매주말 자전거라이딩이 계속되고 있다. 1, 2, 4주는 고교 바이콜, 3주에는 육사동기회 정기모임 일정이다.

지난 주에는 국방부 예비역 종교활동 참석 후에 승용차에 자전거를 싣고 점심식사 장소에 가서 합류했는데 이번에는 가까운데 전철역이 없어 중간합류 방법을 찾지 못하고 부득이 오전일정을 다 포기하고 처음부터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문화 유람 답사여행

일반적 자전거동호회는 라이딩 위주로 어디에 가서 몇 km정도 라이딩을 했는가가 관심사이지만 우리는 다르다. 그야말로 유람이다. 있는 길, 없는 길을 찾아서 가고 포장, 비포장길을 가리지 않는다. 역사문화답사를 하는 길은 오르막이거나 흙길이 많고 계곡의 입구나 상류를 가려해도 마찬가지이다. 도상이나 구글지도로 길을 찾아 안내하는 최고의 전문가가 있고 가는 곳의 역사적 사연을 술술 풀어 설명해주는 역사해설 전문가도 있어 어디를 가거나 자체적으로 완벽하게 풀서비스가 되고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전하는 역사이야기는 참 흥미롭다. 예전사람의 삶을 당시의 관점으로 살펴보고 또 지금시대의 시각에서 비교해 보기도 한다.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져 가는지, 누가 이끌어가는지, 그 흐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浮沈이 어떻게 되는지 오늘의 우리네 삶과 비교하면서 교훈으로 삼게 된다.

개발과 보존

급격한 발전이 거듭되고 있는 우리나라는 격오지 농촌지역을 제외하고는 예전의 풍경이 살아있는 곳이 많지 않다. 멀리서 보이는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서울 북쪽의 큰산들은 예전이나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데 그 자락에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모두 변해도 너무 변하여 예전에 익숙한 지역이라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50여년 전 초급장교 시절에 정겹게 다니던 의정부의 골목들, 탁구장이 있었고 처음 오픈한 생맥주집에서 낭만을 즐겼던 그곳, 어쩌다 막걸리집에서 젓가락 장단에 노래도 불렀던 허름한 골목, 여공들이 많았던 신성통상, 나전모방 방적공장을 담프차에 벙사들이 타고 방벽공사장으로 이동하면 병사들의 군가소리가 저절로 커졌던 그런 추억이 살아 있는 의정부, 수락산일대 지역이다. 눈감으면 당시의 풍경들이 어제 일처럼 금방 되살아 나지만 눈뜨면 지난밤 꿈처럼 사라진다. 지금의 현상 역시 그렇지 않겠는가? 오늘의 생생한 현실도 내일이면 50년 전의 추억과 그리 다르지 않을게다. 그러니 현재에 부족함없이 행복하게 사는게 지혜이지 따로 내일을 기다릴 일이 아니다.

좋은 날, 좋은 코스를 잡은 친구 덕분에 50여년 전의 젊은시절로 되돌아 가보기도 하고 또 650여년전의 역사를 살펴보는기회가 되기도 한다.

★코스: 의정부역~ 부용천~ 민락천~ 귀락천~ 민락천 상류~ 본민락천 상류~ 성산사지~ 민락천~ 무지랭이 계곡입구~ 고산로~ 부용산/신숙주묘~ 고산로~ 송산로~ 숫돌고개~ 수락산유원지 (설악숯불닭갈비/막국수 점심)~ 청학천~ 용암천~ 별내역(40km)

의정부역에서 만나 출발

송산사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많은 충신들이 낙향하여 숨어 지냈다.

수수꽃다리:
라일락의 순수 우리말 이름이다.
조팝나무:
화투장 4월 흑사리가 이 나무란다.

무지랭이계곡 입구로

신숙주선생 묘
6대 왕에 걸쳐 관직을 하고 59세에 돌아가시기까지 영의정을 두번 지냈다.
훈민정음창제와 한글보급에 기여한 공로로 한글학회에서 공적비를 세웠다.

수락산뒤편 일대가 대대적으로 개발되고 있어 지나갈 길도 없다. 우회

숯돌고개의 대전차장애물

수락산유원지 부근 맛집에서 점심식사

별내역에서 마감

 
*송산사지(松山祠址)

경기도기념물 제42호. 고려 말 여섯 충신의 절의를 추앙하여 1798년(정조 22) 경향의 사림들이 세웠는데, 1868년(고종 5)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그 뒤 1964년 유림에서 150평 되는 옛터 노천에 조윤(趙胤)·정구(鄭矩)·원선(元宣)·이중인(李中仁)·김주(金澍)·김양남(金揚南)의 위패를 오석으로 만들어 모셨다.

*신숙주선생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명나라의 언어학자인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뒤에는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수년간 겸임하였다.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좌익공신익대공신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정인지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