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Ft. Belvoir 美 공병학교 고등군사반 과정 수료 동창들의 모임
여추
2024. 7. 6. 17:08

'24.7.5(금) 18시, 산들해 송파점에 美육군공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과정 수료자 선후배 6명이 참석하여 저녁식사
美육군공병학교 OAC 유학과정
1년에 1명씩 선발되어 유학가는 교육과정이고 기간이 1년이 되지 않아 앞뒤 선후배들간 인계인수도 거의 없이 대부분 독립적으로 교육을 다녀온다. 그래서 개인들마다 경험하고 느낀 사연들이 천차만별인 것같다. 또 시대적으로도 문화가 많이 달라지기도 했다.
전역이후 2013년의 어느날이었던가, 원주 1군사령부 근무시에 1107야공단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10년 후배를 우연히 만나 美 공병학교 OAC과정을 수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몇명의 수료자를 알고 있다고 하여 한번 만나보자고 했다. 가까이 여건이 되는 선후배들이 만난게 시작이 되어 어느새 11년째가 되었다.
식사모임도 하고 골프모임도 가지다가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중단된지 6년만에 모임을 갖게 되었다. 형식이 있는 동창회 모임이 아니라 그냥 느슨한 형식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공병에서는 전역 이후에도 건설, 설계, 감리분야에서 직장근무를 거의 대다수 하고 있고 근무지역이 전방부대로부터 전국 여러곳에 있어 시간, 공간적으로 모이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다.
지난 6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 정기연주회에 갔는데 마침 이원섭후배가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연락이 다시 이어졌고 이번의 식사모임까지 갖게 된 것이다. 14년 후배인 육사41기까지 동참했다. 유학다녀온 인연이 이어진 후배들이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의 평화유지군 단장으로, 또 유엔본부 참모로, 각국 무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지금도 외국관련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어학능력을 잘 활용하고 있어 보인다. 대견한 후배들이다.
26사단에서 유학시험 선발
임관하여 첫 근무지였던 26사단 공병대대에서 소대장, 공사장교, 정보장교를 하고 1중대장으로 1년반 정도 된 8월경에 사단장 장태완장군의 전속부관 겸 비서실장으로 갑자기 가게 되어 공병학교 고등군사반 갈 기회를 놓치고 있던 터였다. 1976년 말이었던가, 인사참모께서 美공병 고등군사반 시험이 있다는 공문이 왔다고 했다. 'Good morning'도 제대로 못하는 정도의 영어수준에서 한달정도 집중 준비했는데 1명 선발에 용케 합격되었다. 다음해 1977년 2월에 행정학교 군영반에 입소, 5개월간 영어속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꿈도 꾸면서 지내다가 ECL합격하여 8월에 드디에 버지니아 Ft. Belvoir 美 육군공병학교로 유학길에 올라 1978년 4월에 귀국하게 되었다.
당시는 미국 군원으로 교육비를 부담했던가 싶다. 급여를 미리 받아 이 자금으로 집을 사기에는 부족하여 포기하고 '백색전화'를 샀던 것같다. 이후 교환기에서 자동화기기로 발전되면서 백색전화기, 청색전화기가 같아지면서 투자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8월 출국전, 6월에 남동생이 먼저 결혼하고 그해 11월, 미국에 있는 사이에 여동생도 결혼했다. 나는 이듬해 4월 귀국하여 12월에 집안에서 가장 늦게 결혼식을 올렸다.
신나게 활동했던 유학생활
총각때의 유학기간이라 공부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8기통 대형 중고차를 700$에 사서 좋은 카메라 들고 주말마다 다녔다. Washington D.C가 불과 1시간 거리라 돌아볼 곳도 많고 동북부지역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Mapping School에 3사출신 변대위가 와 있었는데 그는 결혼을 하고 와서 관심사항이 어린이 장난감과 가정 생활용품 등이라 여행을 다닐 여유가 없어 보였다. 연말이 되어 긴 연휴기간 동안에는 남쪽으로 Ft.Lee 군수학교에 유학온 선배들과 합류하여 동남부로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맨끝의 Keywest까지 갔다가 알라바마, 죠지아를 지나 10여일 동안 긴 여행도 했다. 운전하고 부대숙소 예약하고 숙소에서 밥하고 거의 모든 일을 혼자서 다했던 것같다.
일요일에는 가끔 학교안에 있던 한인교회 목사의 예배에 참석하여 1주간 밀렸던 우리말을 마음껏 하고 듣고 신도들 집을 순회하며 맛있는 된장찌개와 김치 등 한식도 먹고 했다.
학교 강당 벽에는 눈에 익은 맥아더장군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West Point를 졸업하고 맥아더장군은 공병소위로 임관되었다고 했다. 아마 Ft.Belvoir에서 초등군사반(OBC)교육을 받지 않았겠나 싶다. 이후에 보병으로 전과했던 것같다.
컴퓨터를 배우고 새로운 전술체계 도입
우리가 주산을 쓰고 대수자를 이용하여 log를 계산하고 할때 그들은 휴대용 계산기를 썼고 수업시간에는 컴퓨터를 배웠다. 교재와 교범 등 400여권의 책을 가져와서 공병학교 교리발전에 번역하여 반영했고 교육사령관 표창도 받았다.
공병전술 교관을 하면서 교리체계가 바뀌기 시작했다.
공격, 방어 =>
mobility (기동)
counter mobility (대기동)
survivability (생존성)
군사학처, 야공학처의 각 과목별 교육을 종합적으로 포함하는 종합전술훈련을 초군반, 고군반 과정에 신설했다. 그러다 보니 고군반 총 1000점 중에 마지막 과정의 광주 상무대로 가서 타병과와 함께 하는 '상무훈련'을 포함하여 250점을 관장하는 교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길지 않은 유학경험 덕분에 육군대학 졸업 후에 의정부 한미야전사 Forester중장과 Vaught중장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했고 이후 한미연합사 참모부장으로 근무할 기회도 가졌다. 전역 이후에도 삼성 임원으로 용산미군기지 평택 이전사업을 위해 미국 Jacobs社와 컨소시엄으로 협력사업을 추진했고 국방부 위촉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지뢰 및 불발탄 제거사업 협의단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여러 후배들이 곳곳에서 어학자원으로서의 재능을 바탕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 많이 익히고 경험을 쌓아두면 평생의 재산이 됨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6년전인 코로나 이전 2018년 모임,
그때 내나이가 지금보다 더 들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