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대만 3일차 석굴암 불상을 본뜬 본존불상 자항사와 중태선사 순례
여추
2019. 3. 28. 15:07
개인과 나라의 범위를 초월하여 큰 뜻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가 참 많구나 새삼 절감하는 성지순례가 되고 있다.
모두의 경우를 보면 공통적 요소가 몇가지 보인다.
첫째는 그런 큰 뜻을 세우고 실천하신 분들은 세상이 하나라는 이치를 깨달으신 분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我相'이 없다. ego가 없다.
둘째로는 여건이 좋아서 그런 역할을 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못했고 지극히 가난한 경지를 겪었다. 그런데 '청정'이 바탕이 되니 사람들이 감동하여 동참하고 하늘이 도운다. 우연인 듯 좋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힘이 모여진다.
셋째로는 이런 활동에 동참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적극적으로 기부 및 봉사에 참여하고 이에 환희심이 일어나며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평생 추구해도 무지개처럼 잡을 수 없는게 행복이었는데 여기에는 언제나 있다.
타이페이시 자항사
자항사(慈航寺) 스님들이 세계 여러곳을 순례한 끝에 자항사 큰법당(彌陀淸淨殿)에 주불을 어떤 불상으로 모실까 의견을 모은 결과 석굴암 불상으로 조성하는데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원석을 인도에서 가져왔고 석질이 단단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석굴암을 48회나 방문하면서 기도와 정진으로 정성스레 조성했다고 한다. 참 청정한 지극정성이다.
불상이 경배의 대상은 아니지만 신심을 일으키는 상징이 된다. 석가모니부처님 입멸 후 불교의 초기에는 불상이 없었고 깨달음의 상징으로 법륜과 녹야원 사슴, 보리수나무 등을 그림으로 그리다가 후대에 와서 불상으로 조성하는 문화가 시작되었다 한다. 불상이 나라마다 그 나라의 인물을 기준으로 함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우리 눈으로 보기에 1,400여년 전에 조정된 석굴암불상 만큼 원만하고 편안한 상호가 없는 것같다. 아무리 정교하게 본뜨려 해도 느낌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만하기 어렵다.
<이수덕회장의 評>
慈航禪師는 중국 근대 4대 스님 중의 한 분이며 唐의 현장스님 이후 번성했던 唯識이 宋 이후 선종이 번창하며 차츰 쇠잔해졌는데 중국 유식을 중흥시킨 太虛大師의 상좌로 2차대전 후 모택동의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북부 천주교(스페인 영향)와 남부 기독교(네들란드 영향)와 함께 도교의 나라로 알려진 대만으로 와서 불교를 홍포하여 많은 학교를 지었다 한다.
1955년 열반에 드실 때 큰 항아리에 들어가 상좌들에게
"내가 죽고 나면 항아리의 두껑을 닫고 3년이 지난 후에 다시 두껑을 열어 주검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等身佛로 모시고 주검에 흠이 생겼으면 화장을 하여라"라고 하셨다.
당시 대만 사회가 혼란하여 상좌들이 선사의 유언을 잊고 항아리 두껑을 5년이 지나도록 열지 못했다. 이 때 모든 상좌들의 꿈에 선사가 나타나서
"왜 두껑을 열지 않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200여명의 상좌가 증명스님을 모시고 항아리를 열자 머리카락만 자랐고 다른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그대로 금을 입혀 '등신불'로 모셨다고 한다.
사찰이 참 이쁘게 가꾸어져 있다
옥돌 고급 제품이 많다.
작은 황금옥꽃병이 40여만원, 큰 것은 수천만원에서 억대가 된다.
태풍과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전날 갔던 협곡의 높은 절벽산도 바다밑이 오랜세월 융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구도 생명체라서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다만 짧은 시간만 볼 수 있는 우리 눈에 안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관광버스 수십대가 주차장에 서있다.
對上以敬
對下以慈
對人以和
對事以眞
이런걸 알지 못한다 해서 실천되지않는 건 아닐지라도 좋은 지식을 얻으러 학교에 다니고 유학도 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실천되지 않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知行이 일치되도록 살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