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초등학교시절을 회상해 본 태릉GC의 봄날에

여추 2020. 4. 29. 23:33

초등 친구들이 태릉GC에서 1팀으로 함께했다.

1955년에 입학하면서 함께 뒹굴고 지냈던 어깨동무 친구들이다. 65년이 지났어도 여기 친구들을 만나면 금방 '영전국민학교' 시절로 시간공간이 이동된다. 마법이면서 현실이다. 어떤 과거이든 떠올리는 즉시 시공을 뛰어넘어 모두 현재의식의 스크린에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으니 이게 마법아닌가?

1학년때는 교실이 흙바닥이라 깔개를 가지고 가서 깔고 앉아 공부를 했다. 아버지가 볏짚을 엮어서 엉덩이크기보다 조금 크게 잘라 둘둘 말아 주셨다. 쌀이 부족하여 거의 보리밥만 먹고 살았다. 6.25전쟁 후 미국에서 원조물자를 보내와서 그 중에 우유가루를 학교소사가 배급해 주었다. 소사가 우리누나 동기라서 나한테는 누나주라고 한바가지 더 얹어 주었다. 윤이 반질반질 하고 뽀독뽀독 소리가 나는 우유가루를 밥위에 찌면 딱딱하게 굳어져 과자처럼 입안에 넣고 녹여 먹었는데 기름끼가 많아서인지 많이 먹으면 설사를 한것 같기도 하다.

90여명이 한반에서 공부하다가 4학년이 되어서는 교실여건이 되어 두반으로 나눠졌다. 1반은 이날 참가한 수덕이 친구가 반장을 했고 2반은 내가 반장을 했다. '시건'이 안들어서인지 나는 반장이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졸업때까지 멍청하게 지낸 것같다. 공부를 열심히 한 기억도 별로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들에 일하러 갔다 와서 옷갈아 입고 밥먹고 학교 나서기 바빴고 학교 다녀와서는 또 일하러 나가 저녁때가 되어 집에 왔다. 밤이면 어머니 친구분들이 거의 매일 우리 안방에 모였다. 풍년초 담배연기가 방안에 자욱하여 문을 조금씩 열어 환기를 시키는 그 구석 희미한 호롱불아래에서 숙제를 했다. 국민학교 교육내용이 그냥 보면 아는 것이지 별도로 공부를 더할게 아니었던 듯싶다. 지금은 선행학습이라고 미리 상급과정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일반화된 추세라 어린이들에게 부담이 큰 것같다.

부친이 면장인 인한이 친구처럼 형편이 좋은 몇몇을 빼고는 거의가 다 어렵게 살았다. 어쩌면 그 덕분에 고향에서는 먹고살기가 어려우니 입하나 줄이려고 읍내로, 도시로 일하러 나가 여건되면 공부도 하고 해서 지금은 대다수 자수성가, 개천에서 용나듯이 그렇게 살고 있다. 국가성장기에 때를 잘맞춰 태어난 행운으로 어릴적의 가난으로부터 현재 세계 10위권의 첨단시대를 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1960년대와 1970년대 시절을 되돌아보며 한참을 웃었다. 당시에 결혼한 선배가 사관학교를 가려는데 총각이어야 하니 옆 친구 형이 면사무소 병사계 근무하면서 서류를 해준 덕분에 장교로 군생활 잘했다고 지금도 고마워한단다. 면서기 파워가 대단했던가 보다. 우리 형님도 결혼 후에 군에 가서는 선본다고 휴가나오고 결혼식한다고 또 휴가나오고 했던 시절이었으니 곳곳에 융통성이 많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당시의 초등 남여친구들이 지금도 거의 매년마다 전국에서 모여 함께 여행을 하기도 할 정도로 열성적인 친구들이다.

4.28(화) 아침, 태릉에서 향우 2팀

을지코스 4번 티박스가 이즈음의 포토존

청설모가 사람주변에서 간식을 기다린다.

클럽하우스 2층에서 내려다 본 불암산쪽

클럽하우스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