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허난설헌, 신익희, 선죽교의 조영무, 훈민정음의 최광 등 광주지역 역사문화 탐방 가을라이딩

여추 2020. 10. 22. 14:25


● 10.18(일) 경기광주지역 탐방 points:
-홍길동전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과 자식남매의 묘
-독립운동가 국회의장 신익희선생 생가
-최초의 충무공 시호 선죽교의 조영무 묘
-훈민정음 해례본 최항의 묘
-광주-성남 경계 이배재터널 통과

세상은 수평이라 올라간 만큼 내려온다. 권력도 그렇다.

균형상태가 평온이다. 편향된 것은 원래의 균형상태로 회복된다. 기울어진 상태로는 계속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복원력이 작용한다. '自然'이란 스스로 그러한 현상을 말함이다. 사람들의 삶도 그 흐름에 순응하면 순탄하지만 거스르면 고단해진다. 명심보감에 '順天者는 興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전의 원인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가 빠르거나 늦거나 차이가 있을뿐 반드시 나타나오는게 균형유지의 법칙이라 하겠다.

강변이나 개천을 따라 난 자전거길은 대체로 평탄하기도 하고 전용도로로 잘 가꾸어져 있지만 역사문화탐방에 나서는 길은 여러 형태의 길을 지나야 한다. 체력단련으로 보면 순탄한 길을 쌩쌩 달리는게 좋지만 우리는 특별한 친구 덕분에 '덕질' 라이딩 위주로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선생 못지 않은 대가가 있다. IT의 도움까지 받아 구글지도와 입체영상 등을 통해 도상연구로 길을 찾아내어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고 현장에서 앞장서 대열을 이끌어 간다. 연구한 이미지가 하나하나 눈앞에 그대로 현실에 펼쳐지는 광경이 마치 비디오화면을 틀어놓고 가는 듯하지 않겠나 싶다. 길이 끝나고 막힐만한 지점에 묘지 뒤로 풀밭길 100여m가 이어지는 기막힌 길찾기까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날은 묘지 답사가 많아 가파른 오르막길이 많다. 크고 작은 10여개의 오르내리막을 넘었나 보다. 오르기는 힘들어도 내려오기는 쉽다. 급하게 올라 멀리 내려오는 길도 있고 그 반대도 있다. 반드시 올라간 만큼은 내려온다. 그래야 균형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아마 삶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활동이나 다 삶의 고갯길을 오르내리는 수련의 기회가 되고 있다.

★코스요약: 경기광주역~ 경안천~ 곤지암천~ 허난설헌묘~ 신익희선생 생가~ 경안천자전거길~ 퇴촌면사무소~ 조영무묘~ 광동교~ 최항사당묘~ 도마치고개~ 작은장자골~ 광주IC~ 솔치고개~ 굉주시청~ 목현천~ 이배재터널~ 갈현천길~ 섬말공원~ 여수천길~ 야탑역 (45.3 km)

칸나와 코스모스가 핀 경안천을 따라

첫번째 답사지로 허난설헌묘 참배
앞의 자식 두남매 작은 묘가 돌에 새겨진 어떤 싯귀보다 더 어미의 아팠던 마음으로 전해져 온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 여류시인으로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남편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남매의 죽음,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27세에 생을 마감했다. 1608년(선조41년) 남동생 허균(소설 홍길동 저자)이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213수의 詩가 전해져 온다.

두번째 답사지 신익희선생 생가

신익희 선생(1894-1956)은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로서 26년간 상해로 망명, 중화민국 육군중장, 임시정부 차관 부장을 지냈고 해방 후 2대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56년 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를 열흘 앞둔 5월5일 전주유세를 위해 가던 도중 열차안에서 뇌일혈로 쓰려져 숨을 거두었다.
어릴때 '유정천리' 가사를 바꿔 뜻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가 생각난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두고 조박사는 떠나가네
가도 가도 가망없는 당선길은 몇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번째 답사지 조선 개국공신 선죽교의 조영무장군 묘
'충무공' 시호를 받은 13분 중 첫번째

 조영무 장군(1338-1414)은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으로 태조 이성계와 같은 동향인이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우면서도 늘 몸을 낮췄다.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의 철퇴 격살, 제1차 왕자의 난(태조7년, 1398)과 제2차 왕자의 난(정종2년, 1400) 당시 정변의 정점에 조영무 장군이 있었다. 미관 말직의 무관에서 정1품의 영상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내외직을 거쳤다.
말년에는 경기 광주 퇴촌면 광동리에 정착하여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태종의 매서운 칼날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몸을 낮추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號인 퇴촌이 이 광동지역의 面명칭이 되어 퇴촌면으로 불리우고 있다.

퇴촌의 유명맛집 엄지매운탕.
5분차이로 일찍 들어간 덕분에 줄서서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식사할 수 있었다.

4번째 답사지 훈민정음 해례본의 최항 사당과 묘 참배

최항 선생(1409-1474)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학자로 18년간 집현전에만 근무하였으며, 용비어천가, 훈민정음해례, 경국대전 등을 찬진하였고 각종 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문물제도의 정비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세조 때는 영의정까지 오른 입지적 인물이다.

최항선생은 본관이 삭령최씨인데 우리 며느리의 선조가 된다. 사돈댁 어른이기도 하여 큰절을 올렸다.

어느 묘지의 뒤쪽 풀밭을 돌아

이배재터널 진입, 통과, 성남 분당으로

야탑역에서 마무리

'산길샘나들이'앱을 켜고 라이딩하니 다닌 궤적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