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우리 민족의 위대한 상고사에 관한 객관적 자료들을 통한 제2의 역사한류 조성

여추 2021. 2. 25. 14:25
고조선의 역사강역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중에서 위대한 상고사 부분은 적게 다루어 지고 한반도로 위축된 근현대사는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일본의 식민사관 왜곡의 결과이다.

해방 후에도 일제시대의 역사학계가 주류로 이어져 오고 있어 실상을 바로 잡으려는 사학자들은 재야 사학자로 주류에 들지 못하고 학설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2가지 인정되는 길이 있어 보인다.
1)외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자료나 외국인이 언급하는 우리에 관한 사항은 객관성이 있다.
2)출토유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중원대륙 곳곳과 한반도지역의 출토유물 고증을 통해 어떤 문명의 시기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근거를 제시하는데도 제도권 역사학계에서는 여전히 도외시할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학교에서 배운 역사관의 바탕이 있어 다른 관점을 폄하하는 경향이다.

역사는 勝者의 기록이고 强者의 기록이라 했다. 과거에 우리 스스로 약소민족이라고 했는데 이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 강국인 대한민국이 과거 잘못된 일본의 식민사관, 중국의 동북공정을 바로 잡아야 할 입장이다. 특히 위대했던 상고사를 잘 살리는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 스스로 실존의 역사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태인들은 2천년전 성경의 역사를 근거로 영토와 나라를 되찾고 있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이 분야에 대하여 열정을 가진 분들이 많아 연구가 계속 이어져 온다. 여기에서는 외국의 관계자들이 보는 관점 위주로 정리된 자료를 제시해 본다.

동이족(東夷族):
동북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동이족(東夷族)」

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義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도 동이족이라 한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도 동이족이요,

인류최초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보기만 해도 질겁하고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치게 만든 치우천황(尤 天皇)도 동이족이며,

갑골문자, 상형문자, 표의문자, 한문자(漢文字)를 만든 이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 까지도 동이족이었단다.

일본학자 고꼬야스히꼬(吾鄕淸彦)의 기록을 보면,

사마천의《사기(리)》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동이족이 지배했던 동북아 지도

 이 지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는 물론 당시 동이족이 동북아시아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이에 놀란 중국 사회주의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동이족(桓檀族)이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이 아니라 한족(漢族;支那族) 조상이라고,
「왜놈의 역사왜곡」보다 더욱 극심한「뙤놈의 역사왜곡」을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가랑잎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치졸한 방식으로 왜곡 역사를 만든다고 해도 역사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에 필자(오소문목사)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족이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올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 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교수는《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

"4천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 東夷族)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漢族;支那族)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東夷)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달력)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義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一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 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호수(天海)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 신농씨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 장개석(蔣介石) 총통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이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나의 고향이 옛날 백제(요서지방;대륙백제) 땅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이시형은 속이 상했다.
장개석은 모택동에게 대만으로 쫒겨갔다.

3, 임어당(林語堂)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이런 말이 오갔다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20세기 최대 학자 임어당.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

(안호상)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임어당)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안을 당한 안호상은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했으나 거대한 한단고기(桓檀古紀) 고대역사를 복원하지는 못했다.

4, 왕동령(王棟齡)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中國史)》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 尤)였다.”

묘족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인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桓檀族)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그는 이런 글도 썼다.
.. "4천 년 전 (·중략)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에는 이미 묘족(苗族;東夷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이다." 《중국민족사(4 )》

묘족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칭송하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기술한다.

[묘족전통 구전가요(苗族傳統 口傳歌謠)]

千古奇才 橫空賢(천고기재 횡공현)
만고기재 하늘가른 현자이라네
可堪幷論 炎皇間(가담병론 염황간),
염제황제 둘과라도 어찌비하랴.
五兵刑法 君始点(오병형법 군시점)
오졸형법 임금친히 보살피시니
九黎生氣 衝云天(구려생기 충운천)。
구려 백성 사기충천 높이려했네.
席卷中原 華夏聯(석권중원 화하련)
화하연맹 중원땅을 쳐서 이기니
血染江河 五千年(혈염강하 오천년)。
오천년의 황화강물 피로물드네.
英名不因 泳鹿敗(영명불인 탁록패)
탁록패배 아닌것을 영웅이름만
老黑石山 百花宣(노흑석산 백화선)
흑석산의 백가지꽃 증언하누나.

이런 기록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苗)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

5, 임혜상(林惠詳) 교수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 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순임금은 동이사람 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殷)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족인데 동방에서 흥하고 왕성하였다."

6, 양관(楊寬)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殷)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족은 은(殷)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7, 노간(勞幹)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이렇게 주창한다.

"우리들은 동방(東方)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만일 이(夷)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人)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려 쓴 것이다.”

8, 필장박(튠)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 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 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 于寒的北方.)

9, 고꼬 야스히꼬(吾鄕淸彦)

일본 학자 고꼬 야스히꼬(吾鄕淸彦, 진)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지나(支那;中國)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해놓은 것이다.”

10, 유 엠 부찐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 《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썼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나라나 주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1, 시로코고르프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는

《중국사(中國史)》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강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I#)지방에 진출하였다."

이상과 같이 외국의 역사학자, 특히 중국의 역사학자들 까지도 중국대륙은 수천년 동안 동이족(東夷族;桓檀族) 이 지배해 오다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후, 지나족(支那族;漢族)이 탁록에서 치우천황(尤 天皇)과 싸우기 전후에 중국대륙 강회(江淮)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실사(實史)가 한단고기(桓檀古紀)에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해방 후 친일식민사관 역사학자 이병도와 그의 문하 사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오히려 반도사관만 주창하며 일본의 침략사관의 주구(奏狗)노릇을 해 왔었다.

동이족(桓檀族)은 분명히 천산, 천해(바이칼호)와 중국대륙, 사라센까지 12칸국(桓國)을 건설 -통치-지배했던 한단고기(桓 檀古紀)의 민족역사를 가지고 왔건만,

이를 부정하는 친일식민사관 사학자들 때문에 그 활동무대가 한반도로 쪼그라 들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고대 역사를 다시 찾아 우리 선조들의 기상을 온 세계에 알려주자.

지금의 "한류"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