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23-11월 월례답사는 가을단풍 절정의 한양도성 남산구간을 버스, 케이블카로
'23.11.3(금) 14:30, 충무로역 1출 대한극장 앞에서 여의도포럼 회원 7명이 만나 한양도성 전문해설사의 설명과 안내로 한양도성 남산구간 답사 후 저녁식사
동기회 여의도포럼 역사문화답사 월례회 모임이다. 푸근한 가을날이다. 한양도성 전문 해설사에게 설명과 안내를 부탁했다.
시네마스코프 대한극장의 변화
남산 정상으로 가는 버스타기가 장충단공원 정류장에서는 승객이 많아 이전역인 충무로역에서 타기로 하여 대한극장 앞에서 만났다. 대한극장은 극장의 대명사라 할만큼 명성이 높았던 극장이다. 시네마스코프를 상영할 수 있었고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명화가 상영되었다. 오전 관람시 조조관람 할인이 있었다. 단성사, 피카디리 등의 새로운 극장에 밀렸고 지금은 CGV, mega box 등에 밀려 오전상영이 없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최근에는 주인이 바뀌었다. 어떤 미래 운명이 될지 모르겠다. 시간이 공간을 이렇게 변화시키고 있다. 어느 하나도 고정된 것 없이 다 변해간다.
서울 중구의 나무는 소나무다
을지로의 가로수는 소나무다. 속초지역에서 옮겨왔다. 중구와 속초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하면서 속초지역 도로개설시 이설되는 소나무를 중구지역 가로수로 2,3천그루 옮겨왔는데 거의가 다 살아 있다. 퇴계로의 한 거리를 '속초의거리'라고 명명해 주었다. 소나무 가로수 이후 주민들이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가로수가 간판을 가리지 않아 불편이 없고 활엽수 낙엽이나 은행나무 열매 치우느라 불편함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잘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구청장 선거시에 상대측 당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란다.
버스로 남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262m높이의 남산에서 시가지와 북쪽의 산들, 서쪽으로 안산, 인왕산으로부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롯데타워 등을 조망하고 뒤쪽으로 돌아 한양도성 설명이 시작되었다.
1396년에 축조된 한양도성
한양도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조선으로 개국하면서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4년 한겨울철 농한기에 경복궁을 먼저 짓고 이듬해인 1395년 겨울에 곧바로 한양도성을 축조를 시작했다. 농사철 공한기인 겨울 음력 1, 2월 추위속에 49일간, 그리고 한여름 8,9월 추수기 이전에 49일간 전국에서 12만여명이 동원되어 처음에는 구간에 따라 토성과 석성을 쌓았다가 이후 세종때에 석성으로 완성되었다. 총 길이 59,500尺(18.6km)를 600尺씩 97구간으로 구분하여 군현별 책임제로 할당했다. 아마 지금의 1개 郡에 100尺(30m)정도씩 책임을 맡았던 것같다. 구간마다 책임지역과 날자를 새긴 刻字城石이 있어 지금으로 보면 실명제로 책임지도록 했다.
북악산을 시작으로 內四山인 북악, 낙산, 목멱, 인왕산을 연결하여 도성을 쌓아 안쪽을 한성부로 했고 바깥 10리까지를 성저십리라 하여 통제권에 두었는데 그 外四山이 북한산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이다.
과거제도로 선발된 최고 엘리뜨 관료로 운영된 현대국가 조선
지금시대의 시각에서 되돌아볼때 조선시대의 여러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런데도 500년 왕조가 유지된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현상이다.
1,000여년 이전에는 우리 한민족이 동북아의 강국이었고 중심이었던 시대였는데 고려, 조선시대에 지금의 한반도 이내로 국위가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조선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수준은 세계 최고였다고 한다. 한가지 例로 1400년대에 李純之라는 과학자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보다 100년 늦은 1543년에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다. 그만큼 조선의 일부 과학기술 수준은 높았다.
최근에 하바드대 역사학자 슐츠교수가 이런 강의를 했다고 한다.
"일본이 강압적인 군인들에 의해 통치되는 동안 한국은 현대국가와 마찬가지로 교육받은 엘리뜨 관료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과거제도로 최고의 수재들이 발탁되어 요직에서 활동했다. 그러니 제국주의처럼 독재자가 있을 수 없었고 국왕도 민심을 살피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게 우선이었으니 국가가 부담스럽거나 백성의 생업에 지장을 주는 정책이나 사업은 당연히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할 대규모 건축물이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그런 무리한 결심을 하려하면 신하들이 곧바로 "전하,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했을 것이고 그래도 안되면 성균관 유생들이 떼로 몰려와 무릎을 꿇고 농성까지 했을 것이다. 왕의 말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기록하는 사관이 항시 따라 다녔고 그 기록을 왕이 절대로 볼 수 없게 철저히 관리했다. 조선 개국시에 정도전은 나라의 운영방식을 왕권은 상징적으로 두고 내각책임제로 하는 것으로 구상했으나 태종의 힘에 밀려 성사되지는 못하고 개국공신이면서도 척결되어 조선말 고종때에 가서야 겨우 복권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이나, 아시아 여러 제국의 독재자같은 지도자가 나올 수 없는 분위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태종은 생전에 왕위를 22세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골치아픈 인사권과 군령권은 이양하지 않고 세종이 내치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한양도성을 쌓는 부역도 상왕의 이름으로 榜을 냈다. 욕먹을 일은 상왕이 하고 실적은 세종때에 한 것으로 남게 했다. 세종은 한글창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든게 아니라 그들은 반대만 일삼았다. 세종이 거의 비밀리에 작업을 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숙종때에 한양도성의 대규모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인조의 삼전도 항복조항에 성곽을 쌓거나 보수하지 않기로 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이후 숙종은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시행한 것이다.
스토리가 있는 유익한 역사문화답사
남산을 수도없이 왕래했어도 별도로 설명이 없으면 경관만 보고 지나게 되고 스토리가 없다. 여러 코스로 갈때마다 중구청 한양도성 전문해설사의 도움을 받는다. 훨씬 유익하고 스토리텔링이 있어서 좋다.
정상에서 북쪽과 남쪽 서울시가지를 조망하고 정상에 위치한 서울의 중심점, 그리고 이승만대통령 팔순 축하로 지은 팔각정을 지나 케이블카를 타고 충무로방향으로 하산했다. 그리고 부근 맛집에서 점심식사. 매달마다 만나 호기심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살펴보면서 적당히 걷고 무엇보다 활짝 웃는 기회가 되는 이게 바로 최고의 행복이 아닌가 싶다.
충무로역 1출 대한극장 앞에서 우니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명성이 높았던 대한극장과 주변 진양상가, 세운상가 등의 역사적 변천과정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답사시작
세운상가는 종묘 앞에서부터 충무로에 이르기까지 8개동으로 이어진 주상복합건물로서 서울의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에 경제의 중심지라 할만큼의 비중을 차지했다.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인 옛 국회의사당의 의원회관을 여기 빌딩 안에 두어 정치활동의 무대이기도 했다.
오세훈시장 시절에 여기 세운상가를 재개발하여 종묘에서 남산까지 녹색벨트가 연결되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중간에 그만두고 박원순 후임시장이 '도시재개발'이라는 계획으로 바꾸어 보존하는 쪽으로 변경되었다. 다시 오세훈시장이 복귀함에 따라 예전의 계획이 재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남산 정상으로 가는 승객이 가득하다.
북쪽으로 서울시가지와 外四山들
중구에서 용산구로 이동
한양도성의 안쪽은 중구, 바깥은 용산구
한양도성 여장과 근총안, 원총안, 옥개석 등 설명
북악산으로부터 600척씩 97개 구간 중에 57번째 표지석
서울은 25개 區의 중심이 어디가
될까? 여기 남산 정상이다.
왼촉 멀리 안산 인왕산 북한산...
그리고 동쪽
팔각정
국사당터 포지석
봉수대
커이블카 타기 전에 호떡과 커피로 간식
케이블카로 하산
저녁식사는 충무로역 부근 쌈사랑 맛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