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70년만의 누님 초등친구 상봉 주선

여추 2020. 6. 1. 18:09

1950년 ==> 2020년,
5학년 소녀들, 70년 지나 지팡이 짚고 첫 상봉의 감격...

 

보리타작 하기전 이맘때가 식량이 가장 바닥나는 시기여서 '보릿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나 보다.

6.25가 일어난 그해 1950년, 국민학교 5학년이던 그 소녀들은 학교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온갖 바쁜 농삿일을 도왔다. 일손 하나가 아쉬운 농번기라 남녀, 아이들 할것없이 지개를 지고 보리타작을 하고 모내기를 하고 해도해도 일은 끝이 없었다. 우리 뒷동네인 임북리에 살던 누님진구는 8남매로 먹기살기도 무척 벅찼다. 보리타작 하다가 보리꺼스레기가 등더리 옷속에 들어가면 잘 빠져나오지도 않고 엄청 깐지랍다. 5학년이던 그 소녀는 이래 살아서 되겠느냐 싶어 결심을 하고 11살에 무작정 대구로 갔다. 남의 집살이도 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도 했다.

17살에 여군으로 입대했다. 능력이 뛰어나 동두천 미군부대와의 교류로 영어를 익혔고 용산 육군본부 근무도 했다. 어느 최고위직 운전기사가 고향출신인 것을 알고 여러 도움을 받는 사교성도 뛰어났다. 하사관으로 17년 복무 후 전역하여 신학교를 다니고 인연이 닿아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자 공부를 하여 미국에서 25년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수년 전에 귀국하여 우리마을 뒷동네인 고향에 집을 마련하여 농사와 목회활동을 하고 지내신다. 이웃 동생인 우리 초등 여자친구가 만날때마다 소식을 전해주고 연락처를 알려주어 우리보다 9년 선배인 누님과 통화를 하도록 했다. 근래에 고향갈 기회가 없어 만남을 주선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세월만 지나 안타까움만 더했다. 이번에 마침 우연히 '코로나'로 시간여유 생기는 사이에 고향가보자고 주선하여 드디어 70년만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11살에 헤어져 80넘어 만나 어찌 알아보기라도 할까 싶지만 그래도 어릴적 사진 한장이 있어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고 시골에서의 어려웠던 어린시절은 화려했던 청춘의 어떤 싯점보다 또렷이 어젯일처럼 생생하게 회상되는 것같다.

우리동네 100여호에 집집마다 몇남매씩 애들이 골목마다 시끄러울 정도로 많았는데 국민학교에 다닌 친구는 남학생 2명과 누님뿐이었다. 방앗간집 쌍둥이 딸도 학교에 안보냈다. 1946년에 입학한 70여명 중에 여학생은 5명이었는데 임북리, 본천리, 문림리 각1명으로 개비리 절벽고개를 넘어 2~3km를 걸어 다녔다. 학교부근에 2명이 살고 3명은 개비리고개를 넘어 한친구는 본천으로 가고 우리 뒷동네 친구는 우리집에 들렀다가 엄마가 누룽지를 끓여주어 맛있게 먹었다는 추억을 이번에 회고하신다. 그리고 들판을 지나 뒷동네로 다녔단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를 잘한 본천의 남학생과 누님이 진주사범학교로 가도록 권유받았으나 동생들 공부시켜야 되니 어쩔 수 없이 누님은 양보하고 동네에서 한문공부로 이어갔다. 덕분에 우리 동생들이 고등교육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 나는 서울로 유학까지 오게 되었다. 본천에 그 남학생은 몇년 후 선생님으로 모교에 부임했고 평생 교직에 재직했는데 수년 전에 먼저 타계하셨다.

잠시 글로 정리하는 사이에 문림, 본천, 임북리 몇몇 누님 친구들 삶의 시간과 공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살아온 70년 사이에 온갖 일들이 많았겠지만 이날 만남의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잡히는게 없구나. 그 소녀들은 어디갔나? 여러 어려웠던 고통의 시간들, 보람과 행복의 시간들이 다 어디로 갔나? 다 거품이었고 한순간 번쩍인 번개였고 아침이슬이었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지나고 나면 아무런 실체도 없는 기억과 추억의 한토막들이었다. 그 흘러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찾아낸 반짝이는 보석하나를 누님과 그 친구분, 그리고 동행한 우리가 함께 나눈 주옥같은 이벤트가 되었다.

멀찌감치부터 나와 기다리고 계신다.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드디어 10대 소녀들의 상봉!

곁에 아무도 없었더라면 껴안고 실컷 울고 싶었는데 울지도 못했다. 죽기 전에 언제 또 만날 수 있을려나...
올해도 보리가 잘 여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