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6.25 서울수복작전 격전지 참배 - 인천 서울 아라뱃길 중심으로

여추 2020. 6. 28. 17:10

6.28(일) 09:00 당산역 부근 한강공원에서 고교 친구, 가족들의 바이콜릭스 6명이 만나 행주대교 남단~ 개화산과 행주산성이 보이는 아라뱃길 한강합수부에서 6.25 인천상륙작전 희생자 참배 후 아라뱃길따라 정서진에서 u-turn, 계양역까지 50km 라이딩

6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올해의 전반기가 지나간다. 6.25 70주년이 되는 호국보훈의 달도 지나간다. 지난 날의 회고로 보면 모든게 지나갔고 또 지금도 지나고 있어 단지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의 삶으로 보면 달력 일정표를 가득 메우고 오늘이 되기를 기다리며 다가오는 날들이 이제부터 나의 날이 된다.

6월들어 3번째의 6.25 전적지 추모 라이딩이다. 오산 죽미령고개의 UN군 첫 참전 기념비와 의정부지구의 축석령전투 참배에 이어 이제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 과정을 회고해 보는 전적지 참배 라이딩으로 이어졌다.

6월25일 아침에 잠자리에서 편안하게 일어나면서 생각해 보았다. 만약 70년전 이 아침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38선에서 새벽에 적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황급하게 식구들을 깨워 대피를 시작할 것이다. 주변 어딘가에 포탄이 떨어지거나 후방교란이 발생할 것이고 비행기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얼른 짐을 챙겨 어디론가는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부터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려운 고통의 시간들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과정을 숱하게도 거치며 살아왔다. 다행히도 6.25 휴전이후에 가장 위험하고 호전적인 북한과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가운데서도 세계최강 미국과의 든든한 한미동맹 덕분에 평화상태가 지속될 수 있었고 그 사이에 경제발전도 이루어 가난을 탈피하고 이만큼 잘살게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안정과 평화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6.25때의 워커사령관과 백선엽사단장

6.25 남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거침없이 남진을 거듭하여 한달여 만에 낙동강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조선통신사 행열이 걸어서 부산까지 이동하는데 20일 정도 걸렸으니 6.25때의 북괴군은 세계최고의 전투장비와 전투력으로 유엔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인지경으로 남진을 한 셈이다. 겨우 국토의 10%정도인 마산 대구 경주를 잇는 낙동강선에서 이제는 제주도나 사모아로 임시정부를 옮겨가느냐 하는 문제까지 거론될 지경이었다. 이때 6.25의 전쟁영웅 워커장군과 백선엽장군이 진가를 발휘했다. 2차대전 패튼장군의 참모였던 미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Stand or die!"라고 죽기를 각오하고 낙동강방어선을 지키게 하여 인천상륙작전의 기회를 뒷받침했다. 그리고 1945년 평양에서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소련군정을 업은 북한의 권력자로 김일성을 마주쳤던 백선엽장군은 다부동전투에서 사단장으로서 무너져가는 방어선의 선두에서 적진을 향해 권총을 들고 앞장서며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하고 달려 나가 전세를 역전시켰다.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까지 12일

서울을 내주는데 3일, 낙동강까지도 한달밖에 안걸렸는데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로 진격하여 수복하는 데에는 연합군 500여명이 전사하고 2,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많은 희생이 있었고 수복에 12일이나 걸렸다. 최근에 알게된 사실 하나가 녹번동 은평평화공원에 군복차림의 미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 동상이 서있다는 것이다. 대전 목원대 공동창립자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인 쇼대위는 일제시대에 평양에서 선교사인 아버지의 외아들로 2차대전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참전했다가 전역 후 하버드 박사과정을 다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가 태어난 나라를 조국이라고 여기며 싸워야 한다고 해군에 재입대했고 인천상륙작전시 맥아더장군을 보좌하여 성공적 작전을 뒷받침했다. 서울수복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해병대로 보직을 바꾸어 작전에 참가하던 중에 서울수복을 며칠 앞두고 9월22일 녹번리전투에서 부인과 두 아들을 뒤로 하고 29세로 전사했다. 그의 동상에는 이런 성경구절이 쓰여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지금의 내가 소중하고 내 가족과 자식들이 소중한 것과 똑같이 6.25때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유엔군과 우리 선배 전우 한분한분이 다 소중하다. 그분들의 희생에 감사드리며 이제는 우리가 이 자유를 굳건히 지켜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당산역 부근 한강공원에서 6명이 만나 행주대교 방향으로 출발

상암동으로 연결되는 월드컵대교가 거의 완공단계에 있다.

방화대교와 행주대교 남단...
지금은 시민들의 행복한 공원이지만 70년전 이 자리는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을 위해 개화산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행주산성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격전지였다.

 
아래뱃길이 시작되는 한강합수부

오른쪽이 행주산성이고 방화대교 뒤로 보이는 고지가 개화산이다.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수복을 위해 한강을 도하하여 여러 길로 서울로 진격했다.

 아라뱃길로

 우리가 마악 도착하는 11시30분에 폭포수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부부간에 매번 함께 참가하는 김학천/써니영

경복궁의 동쪽 동해안에 정동진이 있듯이 여기 서해안에 정서진이 있다.

 즐거운 점심식사

인천갑문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예쁘다.

계양역부근 도착 5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