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원광사 군종병 진명근병장이 전역하고 후임으로 이상은이병이 전입
제54~60
불교에서의 각종 의식이나 예법 등에서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격식을 많이 따르고 있는데 이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격식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다. 격식까지도 초월하면 격식에 매달릴 이유가 없어진다. 굳이 격식이 없어도 되는 자유로운 상태가 오히려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계율, 교리, 율법 등 모두가 격식을 깨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겠다. 심지어는 불교 최고의 경지라고 하는 열반, 해탈조차도 깨뜨려야 붙잡아서 집착할 게 없어진다.
타파하지만 타파한 바 없이 산다.
'옳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그게 고정관념이 되어 그렇지 않은 것을 탓하게 되고 안되면 화를 낸다.
궤범을 세우기는 하되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오직 모를 뿐
'無有定法'인데 사람들은 틀을 만들어 스스로 구속되기를 좋아한다.
자녀와 배우자 후보 생년월일을 적어 스님께 가서 물어본다. 사업이 잘될건지 물어보기도 한다. 어떤 결정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무엇이든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법은 없다. 생멸세계는 인연에 따라 일어난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온다.
'두려움'을 조장하는 사이비종교가 있는 것도 사람들의 이런 성향을 이용하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는 모든 궤범을 다 타파하는 획기적인 종교이다. 그러면서도 궤범, 법칙을 벗어나지 않게 산다. 집착하는 바 없이 하라는 것이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정해진 격식을 타파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음식 진설 순서도 일정한 격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집집마다 전통대로 하는 것이다.
'차례'도 자기 집에서 농사지은 것을 격식없이 올리는 것이다.
너무 궤범이 없으면 사회가 어수선하니 어느 정도 정하고 있다. 그러니 안 지킨다고 나무랄 필요도 없다. 내면적으로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尋牛圖' 그림에서도 보면 깨달음 얻은 후에 사는 삶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속에서 농사짓고 밥먹고 산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무슨 일이든 다 하면서도 푹 쉬게 된다.
이전에는 잘되기 위해, 직장 상사에게 잘보이기 위해 항상 긴장속에 아부하는 태도로 일을 하니 늘 긴장 속에 있고 피곤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꾸어 마음에 집착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는 경험담을 많은 불자들이 이야기한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퇴근 후 집에 와서도 푹 쉬게 되면서 일은 더 열정적으로 하게 되고 일이 더 잘 풀려나가더라는 것이다. 우주법계가 도우는 것이다.
보시의 삶을 사는 사람
마음공부가 되어 我相에 집착않으니 내가 법신불로 살게 된다. '무량복덕'이 온다.
천재였던 아인슈타인도 뇌의 10%를 못썼다고 했는데 뇌과학에서 새로이 밝힌 바로는 뇌용량은 그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뇌가 안테나, 즉 수신기역할을 하더라는 것이다. 나아가 우주법계 모든 곳곳에 모든 정보가 다 담겨있더라. 티끌 하나 속에 모든 지혜까지 다 담겨있더라. 육신에 갇힌 나를 나로 삼아 살면 모든게 제한된다. 그런데 한계를 두지 않으면 내가 우주법계로 확산된다. 내려놓으면 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이전까지의 고정적 관념이 타파되며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 무량복덕까지도 내것이 된다.
'나는 이런건 못해'
고정된 것은 없다.
스스로 얽매인 것이다.
마음을 열면 집착이 내려지고 일에 부담이 줄어들어 일이 더 잘된다. 크게 스트레스도 안받게 되고 관계도 좋아진다.
시어머니가 甲이고 내가 乙인줄 알았는데 어느날 보니 시어머니가 오히려 며느리 눈치보는 것 같더라. 내가 甲이고 시어머니가 乙인것 같더라. 마음이 편안해지고 관계가 좋아지게 된다.
이렇게 어디든 집착않고 살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면서도 푹 쉬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
원광사 법상스님의 신심명강의
제54~60
불교에서의 각종 의식이나 예법 등에서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격식을 많이 따르고 있는데 이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격식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다. 격식까지도 초월하면 격식에 매달릴 이유가 없어진다. 굳이 격식이 없어도 되는 자유로운 상태가 오히려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계율, 교리, 율법 등 모두가 격식을 깨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겠다. 심지어는 불교 최고의 경지라고 하는 열반, 해탈조차도 깨뜨려야 붙잡아서 집착할 게 없어진다.
타파하지만 타파한 바 없이 산다.
'옳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그게 고정관념이 되어 그렇지 않은 것을 탓하게 되고 안되면 화를 낸다.
궤범을 세우기는 하되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오직 모를 뿐
'無有定法'인데 사람들은 틀을 만들어 스스로 구속되기를 좋아한다.
자녀와 배우자 후보 생년월일을 적어 스님께 가서 물어본다. 사업이 잘될건지 물어보기도 한다. 어떤 결정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무엇이든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법은 없다. 생멸세계는 인연에 따라 일어난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온다.
'두려움'을 조장하는 사이비종교가 있는 것도 사람들의 이런 성향을 이용하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는 모든 궤범을 다 타파하는 획기적인 종교이다. 그러면서도 궤범, 법칙을 벗어나지 않게 산다. 집착하는 바 없이 하라는 것이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정해진 격식을 타파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음식 진설 순서도 일정한 격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집집마다 전통대로 하는 것이다.
'차례'도 자기 집에서 농사지은 것을 격식없이 올리는 것이다.
너무 궤범이 없으면 사회가 어수선하니 어느 정도 정하고 있다. 그러니 안 지킨다고 나무랄 필요도 없다. 내면적으로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尋牛圖' 그림에서도 보면 깨달음 얻은 후에 사는 삶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속에서 농사짓고 밥먹고 산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무슨 일이든 다 하면서도 푹 쉬게 된다.
이전에는 잘되기 위해, 직장 상사에게 잘보이기 위해 항상 긴장속에 아부하는 태도로 일을 하니 늘 긴장 속에 있고 피곤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꾸어 마음에 집착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는 경험담을 많은 불자들이 이야기한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퇴근 후 집에 와서도 푹 쉬게 되면서 일은 더 열정적으로 하게 되고 일이 더 잘 풀려나가더라는 것이다. 우주법계가 도우는 것이다.
보시의 삶을 사는 사람
마음공부가 되어 我相에 집착않으니 내가 법신불로 살게 된다. '무량복덕'이 온다.
천재였던 아인슈타인도 뇌의 10%를 못썼다고 했는데 뇌과학에서 새로이 밝힌 바로는 뇌용량은 그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뇌가 안테나, 즉 수신기역할을 하더라는 것이다. 나아가 우주법계 모든 곳곳에 모든 정보가 다 담겨있더라. 티끌 하나 속에 모든 지혜까지 다 담겨있더라. 육신에 갇힌 나를 나로 삼아 살면 모든게 제한된다. 그런데 한계를 두지 않으면 내가 우주법계로 확산된다. 내려놓으면 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이전까지의 고정적 관념이 타파되며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 무량복덕까지도 내것이 된다.
'나는 이런건 못해'
고정된 것은 없다.
스스로 얽매인 것이다.
마음을 열면 집착이 내려지고 일에 부담이 줄어들어 일이 더 잘된다. 크게 스트레스도 안받게 되고 관계도 좋아진다.
시어머니가 甲이고 내가 乙인줄 알았는데 어느날 보니 시어머니가 오히려 며느리 눈치보는 것 같더라. 내가 甲이고 시어머니가 乙인것 같더라. 마음이 편안해지고 관계가 좋아지게 된다.
이렇게 어디든 집착않고 살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면서도 푹 쉬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
진명근군종병 전역기념품 전달 및 인사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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