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4월10일, 예전에 이즈음 농촌에는 보릿고개의 철로 아직 보리는 덜 익었고 쌀은 떨어져 먹을꺼리가 지극히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누님은 18살이었고 나는 초등 2학년이었다. 엄마는 계속 일을 하셨고 당시에는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지냈으니 동생을 가진지도 몰랐다. 어느날 학교에 다녀오니 동생이 태어나 있었다.

엄마는 혼자서 아기를 낳으셨단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가는 일이지만 그 때는 그랬다. 그때의 일을 83세이신 누님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신다.



농사를 짓는데 왜 쌀이 부족했을까 싶지만 아이들 공부시킬려면 무언가 농사지은 것을 읍내 장에 갖다 팔아야 하는데 몫돈이 나오는데는 가을에 수확한 쌀을 '공출'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1년동안 먹고 살 최소한의 벼를 가마니나 뒤주에 넣어놓고 나머지는 다 가을추곡수매때 팔아야 한다. 가마니에 넣어 지고 가서 조합마당에 내려놓으면 검사원이 쇠대롱을 가마니에 푹 찔러 벼의 품질을 보고 등급을 매긴다. 조금 높은 등급을 받으려고 통사정을 하기도 하지만 잘 통하지 않는다.

아껴둔 벼는 조금씩 꺼내어 디딜방아에 찧어 대부분은 보리밥인데 그 위에 쌀을 조금 얹어 밥을 풀때는 아버지 밥을 먼저 뜨고 아랫쪽의 밥은 거의가 보리밥이다. 쌀 구경하기가 극히 어렵다. 명절이나 제사모실때 제대로 쌀밥을 먹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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