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일) 충무로 충정사 예불연 10월 정기법회에서 주지 명원스님 법문

'中道' : 眞理에 的中

서양에서는 중도를 middle way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중도는 이런저런쪽도 아닌 가운데를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동양에서의 이해는
다이나믹(역동적인)한 삶,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어중간한 가운데를 말하는게 아니다.
외줄타기 하는 사람이 줄 위에서 매순간 중심을 잡는 것과 같이 삶을 사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싯달타는 태자시절에 4가지를 보고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늙은 사람, 아픈사람, 죽은 사람, 수행자(사문)

농사지으면서 벌레가 죽고 새가 쪼아먹고 하는 과정의 고통도 보았다.

''현재의 세속적 행복이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구나.''
그 근본의 길을 찾아 출가했다. 다섯 사문이 따라갔다. 5비구로 계속 함께했다.

온갖 수행으로 당시의 여러 수행법을 다 터득했다. 고행을 했다.
6년간의 수행과 고행으로 당대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는 했지만 진정한 행복은 세속에도 있지 않고 고행에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았다.

고행을 풀고 우유죽 먹고 기운차려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

깨달은 후 처음으로 5비구를 찾아갔다.
첫번째 설법이 '중도'에 관한 것이었다. 쾌락과 고통, 양변을 벗어나는 경지를 말씀하셨다.
극단에 집착하지 말라.

삶속에서 매순간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중도이다. 생사의 중심. 빈부의 중심.
죽어도 괜찮고 살아도 괜찮다. 부자가 되어도 좋고 가난해도 괜찮다. 100억, 1,000억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님을 많이 본다. 부자의 고통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못지 않을 것이다. 00항공 오너의 가족들, 롯데, SK, 삼성 등 대기업들, 그들 가족의 고통은 더 커지 않겠는가?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다 가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중도'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고
생사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서는 열심히 즐겁게 살고 죽는 것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혜로움이 곧 중도이다.

부처님같은 중도의 삶이 되게 여러 수행을 통해 지혜를 드러내어 실천하고 살자.

비누가 몸의 때를 씻어내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그 또한 씼어내야 한다. 아름답고 귀한것도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거기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깨달음에 이르고 극락왕생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지옥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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