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23(일) 1030, 국방부원광사에서 호계원장 보광스님 초청법회 봉행

국군예비역불자연합회에서 격월로 4번째 일요일에 국방부원광사에서 원로대덕스님 초청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지난 4월과 5월에 일정상 시행하지 못함에 따라 6월의 월호스님에 이어 7월에는 보광스님을 모시고 법회를 봉행한 것이다.

최근에 원광사 주지법사로 원경 박종현법사가 부임한 이래 몇주 사이에 눈에 띄게 원광사의 분위기와 움직임들이 달라져 보인다. 매 1~ 2년마다 보직이 바뀌는 군의 특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장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기존의 체제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면 색다르게 볼 수 있으니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보광스님께서는 군법사를 거쳐 동국대에서 선학과 교수로 오래 재직하시다가 동국대총장까지 역임하신 경륜과 식견으로 한국불교의 시대별 변화 흐름이 현재에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잘 정리해 주셨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고 국민들의 일상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광스님 법문요지>

고려개국과 불교

신라불교는 교학불교,
고려불교는 선불교,
조선은 유교, 성리학,
대한민국 건국은 기독교로 시작되었다.

구산선문

신라불교는 주로 교학위주의 불교였는데 신라 말기부터 당나라 유학을 통해 禪法이 전래되었고 고려 초기까지 禪宗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서 떨어진 지방의 산들에 9개의 禪門이 분포되어 있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불교는 지배층부터 민초까지 전국민이 신봉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구산선문은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후삼국시대 각 군웅이나 신라 조정은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승비를 세워주거나 선종 승려가 자기 지역에 머물도록 보호해 주기도 했고 지금도 전국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등 이 시기 구산선문 사찰의 고승비가 많이 남아있다.

실상산문(實相山門), 실상사, 남원
가지산문(迦智山門), 보림사, 장흥
사굴산문(闍崛山門), 굴산사, 강릉
동리산문(桐裏山門), 태안사, 곡성
성주산문(聖住山門), 성주사, 보령
사자산문(獅子山門), 법흥사, 영월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 문경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사, 창원
수미산문(須彌山門), 광조사, 해주

구산선문 호족의 지지를 받은 왕건

통일신라, 고려초기의 구산선문은 지역호족과 연계되어 있었다. (지역조폭 조직들이 가담하여 상부상조하는 역할)

고려를 건국한 왕건(877~ 943)의 부친 왕릉은 개성 호족으로 장보고이후의 대규모 해상무역상이었다.

구산선문 지역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을 출가시켜 당나라로 유학을 많이 보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큰배가 없어 대다수가 왕릉의 무역상선을 타고 왕래했다. 그때마다 왕릉은 가고 오는 유학승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지방호족들로부터 호감을 얻게 되었다.

아들 왕건이 후고구려 태봉국 궁예 밑에서 해군제독으로 후백제 견훤을 공격, 나주까지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육전에서는 백제군에게 여러차례 포위를 당해 운문산전투에서는 스님들의 도움으로 겨우 산길로 피신하는 도움을 받기도 했다.

삼국통일에 지방호족들이 큰 역할을 한 공신들이었다. 그 공로로 사패지 땅을 많이 하사받았다.

왕건은 고려건국이후 지방호족들과 혼인관계로 지지를 받았다. 29명의 부인과 수십명의 자녀를 두었다.

고려 4대 광종은 26년 재위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왕권강화에 장애요소가 많았다.
-지방호족
-외척
-형제간의 문제 등

광종의 왕위책봉식에 後周 사신일행이 왔는데 계속 폭우가 내렸다. 사신이 떠나기 전에 행사를 해야 하는데 비를 그치게 祭를 올리려 해도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31세의 均如스님이 나서서 祈晴祭를 올려 비가 그치고 무사히 책봉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사신 일행 중에 雙翼이 배탈이 나서 함께 가지 못하고 남았다. 그가 귀화하여 後周의 여러 제도를 자문했는데 그 중 지방호족문제 처리에 관한 것으로 넓은 땅을 경작하는 노비를 해방토록 했다. 즉, 노비안건법 시행으로 노비를 해방시키니 호족들이 넓은 땅의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노비들 중에는 과거 신라 왕족, 귀족출신도 많았다.

과거제도 시행

교학불교에서 선불교로 전환되면서 누구나 부처님법을 깨우치면 부처가 되는 것처럼,
군왕의 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능력이 있으면 왕이 될 수 있다는 卽心是佛說의 선종사상이 보편화되면서,
과거제도를 통해 누구든 능력이 있으면 인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호족의 출세길 차단, 세습등용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노비출신도 과거에 합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호족들의 힘을 줄이고 강력한 중앙집권이 시작되었다.

한편으로 불교계에서는,
화엄종스님들끼리 다툼이 벌어졌다.
화엄사상으로는 안되겠구나 하여 융합적인 염불禪이 크게 유행하였다. => 禪과 염불을 兼修하는 통합불교를 제창했다(법안종).

지금의 한국불교는 당시의 통합불교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한국불교 1,600여년의 역사는 국민을 통합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법회전 차담 후 큰법당에서 법회

보광스님 법문

합창단공연

탈북대학생 2명에게 장학금 전달

정근 및 축원

거마비를 드리니 예불연 발전 후원금으로 다시 전해 주신다.

기념촬영

백상홀에서 점심공앙

카페에서 차담

원경 주지법사께서 원광사 활동사항은 예고해 주신다.

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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