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저자 일연이 김씨 아닌 전씨라는 것을 밝혀낸 사연현재 우리는 한자와 한문을 홀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글 |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성은 김(金)씨가 아닌 전(全)씨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된 일연(一然:1206~1289)의 인적 사항이다. ‘경주 김씨’라 했으나 일연의 본관(本貫)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경주 장산군(慶州章山郡) 사람이다.’라는 문장에서 경주를 본관이라 한 것으로 여겨지나 여기서 경주는 장산군의 주군(州郡)일 뿐 본관이 아니다. 견명(見明)은 초명(初名)이며 이를 바꿔서 나중에 일연(一然)이라 하였다. 견명이든 일연이든 법명이 아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언정(彦鼎)이라 하였으나 이는 언필(彦弼)의 잘못이다. 문제는 ‘경주 김씨’라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성을 ‘金’씨라 한 것에 있다. 본 백과사전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든 사전이나 학술논문, 대중역사서, 일연 관련 자료 등에서 성을 소개할 때는 반드시 김씨라 한다. 하지만, 일연의 일대를 자세히 기록한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에 따르면 이는 잘못 읽은 것이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는 일연이 생애의 마지막 5년을 보낸 인각사(麟角寺)가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과 인연이 있는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찰 경내에는 일연의 승탑인 ‘보각국사 정조탑(普覺國師靜照塔)과 탑비에 해당하는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가 있다.
이 비는 일연이 입적한 후 충렬왕(忠烈王)의 명에 따라 비명(碑銘)을 짓고, 동진(東晋)의 명필 왕휘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하여 사후 6년 만인 1295년에 완성했다. 이후 비석은 여러 전화(戰禍)를 비롯한 900여 년의 풍파를 겪으며 산산조각이 나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겨우 두 조각만 남아 비각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남아있는 비석에는 전면 2,288자 중 227자, 후면 1,670자 중 142자가 남아 겨우 읽을 수 있는 정도다.
보각국존비의 비문은 일찍이 전문(全文) 사본(寫本)이 전래되어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하권에 수록되고 이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상권, 최남선의 「삼국유사해제(三國遺事解題)」 등에 실려 그 내용이 널리 알려졌다. 또, 20여 종의 탁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대부분 파손 후의 것인데다 일부만을 알 수 있는 부분 탁본이다. 그러다가 1981년 한국학중앙연구원(당시 정신문화연구원, 이하 한중연이라 함)이 매입하여 공개한 탁본은 전면(前面)이긴 하지만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최고의 선본(善本)이라 할 수 있다.
한중연은 이를 공개하면서 『普覺國尊碑銘(보각국존비명)』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고 아울러 비문의 석문(釋文)을 제시하면서 기존 필사본에 있었던 오독(誤讀) 부분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또, 2001년에는 한국서예협회에서 한중연본 『보각국존비명』을 확대 편집하고 김남형 교수의 역주를 첨부한 서첩을 발행하기도 하여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래는 전면 탁본 중 일부로 일연의 성씨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글(비문)에 대해 지금까지는
“國尊諱見明, 字晦然, 後易名一然. 俗姓金氏, 慶州章山郡人也. 考諱彦弼, 不仕以師故贈左僕射, 妣李氏封樂浪郡夫人.(국존의 휘는 견명이요 자는 회연이며 후에 일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속성은 김씨로 경주 장산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언필인데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선사로 인해 좌복야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이씨는 낙랑군부인에 봉해졌다.)”
라고 읽고 일연의 속성을 ‘金’씨로 소개하였으나 이는 잘못 읽은 것이다. 우선 「보각국존비명」에 있는 나머지 ‘金’자와 집자의 대본으로 삼은 왕희지의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의 ‘金’자와 비교해보더라도 일치하지 않는다.(그림 1)
또, 「보각국존비명」에는 우측 그림과 같이 ⓵번 글자와 유사한 형태의 글자가 한 번 더 등장하는데
지금까지는 이 글자를 모두 ‘令(령)’으로 읽어 ‘判觀候署事令倜(판관후서사영척:관후서 판사 영척)’이라 하였다.(그림 2)
여기서 영척은 문맥상 인명(人名)이어야 하기 때문에 ‘령(令)’이라는 성씨는 자연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 글자도 「보각국존비명」과 「삼장성교서」에 나오는 ‘令’자와 비교해보면 마지막 획이 달라서 ‘令’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그림 3) 그런데, ①번 글자와 ②번 글자를 겹쳐보면 외형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그림 4) 이에 따라 ①번과 ②번은 동일한 글자로 이는 바로 행서 ‘全’자의 자형(字形) 중 하나다.
(그림4)
이 글자를 ‘全’자로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와 같은 자형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집자의 대본으로 삼은 <삼장성교서>에도 동일한 형태의 글자가 등장한다.(그림 5)
(그림5)
이제 ①번 글자와 ②번 글자, 그리고 「대당삼장성교서」의 글자인 ③번을 겹쳐보기로 한다. ‘金’자로 알려진 ①번 글자와 ③번 「삼장성교서」의 ‘全’자를 겹쳐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기는 하나 전체적 형태는 거의 일치한다.(그림 7) 또, ‘令’자로 알려진 ②번 글자를 ③번 글자와 겹쳤을 때도 일치한다. 이러한 비교에 의해 ①번, ②번, ③번 글자는 모두 동일한 글자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全’자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金’씨로 알고 있던 일연(一然)의 속성(俗姓)은 ‘全’씨로,
‘判觀候署事令倜’의 ‘令’도 ‘全’임이 확인되었다. 동일한 자형을 전혀 엉뚱하게 읽은 것이 이제 바로잡혀진 것이다. 현재 우리는 한자와 한문을 홀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
현재 인각사에는 2006년에 많은 공력을 들여 재현(再現)한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의 재현 과정에는 그동안 알려진 모든 탁본 자료와 수많은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재현된 비석의 글씨를 살펴본 결과 탁본과 전혀 다른 자(字), 아예 글자가 되지 않은 자, 운필(運筆)의 법칙을 무시한 자 등 오류가 명백한 글자만 세어보더라도 대략 서른 자가 넘는다. 그 대표적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연의 속성을 ‘全’이 아닌 ‘金’으로 새긴 것이다. 탁본에는 약간의 마멸이 진행되기는 하였으나 행서 ‘全’자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글자이다. 재현 과정에서 가능하면 원본대로 살려서 새겼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金’자를 가져다가 새겼다. 이는 이 비석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중대한 실수다. 필자는 평소 금석문(金石文)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중 「보각국존비명」 탁본 자료의 이미지 복원을 마친 바 있다. 복원 과정에서 왕희지 글씨 집자비로 알려진 「보각국존비명」의 세밀한 부분까지 살피면서 많은 오류를 발견하였으며, 그 가운데 ‘全’자의 오독(誤讀)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한문과 서예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문을 알아야 문맥을 알 수 있고, 서예를 알아야 운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한문을 모르면 문맥을 파악할 수 없고, 서예를 모르면 단순한 이미지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없는 점획(點劃)을 그려 넣기도 하고 있어야 할 점획을 없애기도 한다. 역사 연구를 위해서는 한문뿐만 아니라 서예도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지금 한글 전용 시대를 살고 있다. 한자와 한문을 몰라도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한문을 몰라 엉뚱하게 사용하는가 하면, 정확한 뜻을 모르고 사용하는 용어가 적지 않다. 혹자는 책을 읽으면서 한자가 없어도 앞뒤 문맥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한다. 하지만, 한자가 있으면 앞뒤를 살필 필요도 없이 보는 순간 바로 알게 된다. 짧은 문장이야 앞뒤 문맥을 보면서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 분량이 방대할 경우에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어렵거니와 전후 문맥 통해서 파악하는데 소요되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전문 연구자들이 읽는 학술서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특히 우리 역사를 비롯한 한국학 분야는 한문을 모르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책에는 한글로만 표기하니 곳곳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발생한 오류는 또 반복된다. 한국사 교과서를 읽고, 연구 논문을 읽고, 학술서를 읽다보면 한자와 한문의 이해 부족에 따른 오류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역사 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진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현재 우리는 한자와 한문을 홀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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