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25(금) 육사27기 대열동기회 78명이 버스 2대로 강화 교동도지역으로 가을여행

가을구경하기 좋으면서 오가기 쉽고 유익한 여행지

나이들면서 장거리여행이 불편하고 많이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경향이라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면 1시간반 전후의 이동거리가 되는 곳이 적절하다.

재작년에는 한탄강주상절리 지역을 다녀왔고 타 여러지역을 검토했다.
수덕사 해미읍성 간월암 코스
제부도케이블카 대부도코스
낙산사 삼척촛대바위 해안코스
산정호수 및 일동온천 코스
감악산출렁다리 코스
임진각 3땅굴 안보코스
군산 선유도 새만금코스

그 가운데 강화도로 낙점

그 여러곳들 가운데서도 사무총장이 오래전부터 강화도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터라 우선적으로 답사하고 추진하게 되었다. 강화도일대는 수십번을 다녀왔던 터라 익히 알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포인트라 할만한 데가 없이 그냥 강화도 전체가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곳곳마다 의미가 있기는 하다. 답사와 공부로는 괜찮아도 관광으로는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는데 최근 수년 사이에 여건이 많이 달라진 것같다.

우선 두개의 큰 섬인 석모도와 교동도로 교량이 신설되어 이전에 바지선에 차량을 싣고 왕래하던 불편함이 사라지고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동도에는 규모가 큰 정원이 조성되고 정상 전망대로 가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전답사를 통해 기본방향을 잡았다.
-걷는 코스를 줄이고
-구경하기 좋은 곳
-맛있는 식사
-흥미있게 설명/해설
-아침 집결/저녁해산 지점 교통

각분야 전문가 친구들이 있어 걱정이 없다. 자료를 정리하여 해설자료로 준비하여 이동시에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아래의 설명자료를 활용하면 누구나 안내와 해설을 할 수 있다.


※코스:
08시 당산역 집결/출발~ 강화 연미정~ 평화전망대(제적봉)~ 화개정원(연산군유배지)~ 제비집/대룡시장~ 외포리 삼별초항몽비(점심식사)~ 조양방직~ 갑곶돈대(박물관)~ 광성보~ 초지진(저녁식사)~ 김포공항역(해산)

<시간 일정>
0805 당산역 출발
0910 연미정 도착
0930 평화전망대
1010 화개정원
1050 대룡시장 제비집
12시 서울횟집 점심

1500~ 조양방직
1540 조양방직 출발
갑곶돈대 박물관, 400년 탱자나무, 광성보 진지,
초지진 큰소나무 답사
1745 저녁식사
1835 초지대교 식당출발
1930 김포공항역 도착/해산

서부지역으로 여행시에 9호선 급행과 2호선으로 오기 쉬운 당산역을 출발점으로 잡았다.

13번출구 직진 그랜드컨벤션 앞에 버스 2대가 정차 가능하다.

첫번째 방문지 '연미정'에 도착

왜 연미정이 중요한 지점인지 해설서에 있고,
앞쪽 작은 섬 유도에 관련된 2가지의 사건이 있다.

두번째 방문지 평화전망대(제적봉)

버스가 정상까지 올라갔다.

북한땅이 바로 건너다 보인다.

걸어서 하산

민통선 통과

교동대교

세번째 방문지 화개정원

교동도의 산골짜기 하나 전체를 정원으로 조성하여 화개정원이라 하고 모노레일로 정상 전망대로 갈 수 있게 했다. 단체팀은 대기시간이 워낙 길어서 포기하고 가까운 아랫쪽만 돌아보았다.

연산군유배지
유배된지 2개월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정상 전망대는 바라만 보고

독수리2중대

네번째 방문지 제비집과 대룡시장

다섯번째 방문지 점심식사와 삼별초항몽비

여섯번째 방문지 방문지 조양방직

오래전 방직공장이었던 건물이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변신을 했다.
이날 여행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다.

일곱번째 방문지 갑곶돈대와 박물관

400년된 탱자나무

광성보

초지진의 큰소나무

초지진 부근에서 저녁식사

귀경길 마무리 인사

'Time to say goodbye' 음악을 들으면서...

김포공항역에서 해산


<강화도관광 해설 안내서>


● 강화도의 역사적 의의
► 강화도 명칭은 한강,임진강,예성강의 세 강 아래에 있다 하여 강하도였으나 그후 세
강이 만나는 빛나는 섬, 강화도로 개명 됨.
►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 밀집지역,
고조선의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마니삼 참성단, 세계 5대 갯벌인 분오리갯벌, 신미양요,
운양호사건, 강화도조약, 방어진지(돈대)와 성곽, 궁터가 잔존, 역사의 현장임.
► 왕건이 918년 고려(475년 존속)를 세운뒤,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정중부, 이의방, 서희, 강감찬 등으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이 들어서 외세침략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지내고 있는데, 1206년 칭기스칸(테무진)이 몽골제국을 세워 금나라로 부터 유라시아까지 정벌, 대제국을 세웠고,1231년에는 3대 칸 태종이 고려를 침입하였고, 이에 고려왕 19대 고종은 1232년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하였으며 이때 만든 궁궐터가 고려궁지이며, 그 후 몽골과의 9차례 전투(4:3)가 일어났다.
이후 1232년(고종19년)~ 1270년(원종11)까지 39년간 고려의 도읍이었고 1270년 몽골에 굴속하여 개경환도 후 고려궁지는 파괴되었고, 조선 건국후 고려궁지를 중건하였다.
한편, 조선 인조때 후금(청나라 전신)이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1636년 10월에는 국호를 바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강화로 피신 시켰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결국 삼전도에서 3전9고두례 치욕을 겪게 되었고 강화도로 피신 간 두 왕자는 인질로 잡혀가고, 척화파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은 잡혀가 참형을 당했다.
*칭기즈 칸(황제)(成吉思汗1162~1227,65세): 재위기간: 1206~ 1227.8.18. 21년. 1189년
카묵 몽골의 칸으로 즉위하여 여러 유목민 부족을 통합하여 몽골제국을 건설하고 1215년에는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강한군대”를 표방하여 “인류 최고의 정복군주”로 군림 함. 본명은 테무진(鐵木眞), 몽골
제국의 건국자(반면 동유럽과 서아시아에서는 “학살자, 약탈자, 문명파괴자”라고 평가함)

3. 강화대교: 1969년 완공된 구교 노후로 재시공 후 1997년 780m 대교가 완공됨.

4. 연미정(월곶돈대):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조선 중종시대 삼포왜란(부산포,제포, 염포)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2년 후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野人)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황형(黃衡)장군에게 조정에서 정자를 세워 하사하였다고 한다. 서남쪽 모서리의 기둥은 6·25전쟁 때 포탄에 맞아 세 동강 난 것을 붙여 다시 세운 것이다.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개풍·파주·김포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옆에는 500년 느티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2019년 태풍 링링 으로 한그루가 뿌러졌다.

옛날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이름붙었다.

✸사건1: 2017. 6.18 새벽2시,' 개성→김포'루트로 헤엄쳐 탈북한 21세 청년이 ‘20.7.28 택시로 월곳리에 도착, 새벽 2시에 배수로 통해 철책을 통과하고 헤엄쳐 월북. 탈북때 도착지는 월북때 이용 배수로보다 6㎞ 상류(애기봉 있는 조강리)에 있음.

✸사건2: 1996년 여름 홍수때 북한에서 황소 한마리가 한강하류의 비무장지대 섬 유도에 올라가 홀로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살아왔고, 1997년 1월 17일 김포시청과 해병대에 의해 구출된 사건. 구출된 이 북한 소에겐 남북평화를 가져다줄 거라는 기대 속에 '평화의 소'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당시 거의 모든 언론에 주요뉴스로 일제히 보도됐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됐을까? 1998년 제주 암소와 결혼, 7마리 송아지 낳고 2006년 노사함. 첫 암소는 제주로 보냈다 함.

6. 강화 평화전망대:(032-930-7062, 매일9시~17시, 신분증지참): 북한과 1.8KM’
강화도 최북단 제적봉(制敵峰), 민통선 북방지역에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으며.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까지의 거리는 2.3km이다.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으며, 우측으로는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 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망배단과 강화출신 작곡가 최영섭의 “금강산 노래비”, 제적봉 기념비 등이 있다.

7. 교동대교: 2008.9.25.착공, 2014.7.1. 개통, 교량 2.11km, 접속도로 1.33km

8. 화개정원: 추억, 역사와 문화, 평화, 치유 ,물의정원으로 구성, 연산군유배지가 위치하고 있다.
* 연산군 유배지: 중종반정(1506년)으로 폐위된 연산군은 경복궁을 나와 평교자를 타고 돈의문⇨ 연희궁(일명:서이궁)⇨ 김포⇨ 통진⇨ 강화⇨ 교동고읍을 거쳐 5박 한 후⇨ 고구리안치소로 안치(1506.9.6.~11.8),  2개월만에 역병으로 사망(독살설?)
* 위리안치: 圍(둘레위)籬(울타리리)安置
* 수행원: 당상관1명과 나인4명, 내시2명, 반감1명 등 총 8명(군사 거느리고 호송)
* 연산군 묘는 도봉구 방학동에 폐비 신씨 묘와 나란히 있으며, 폐위된 군주라서 능이 아닌 초졸한 묘임.
* 화개산 화개사: 고려때 창건한 조계사의 말사.

9. 화개전망대: 2023.5월 개관, 연백까지 7Km, 도보시 30분 소요, 모노레일은 9인승으로 5분간격 출발하며 20분(느림보) 소요. 단체 사전예약:032-933-3300,

10. 제비집: 안내소, 제비가 연백의 흙을 물어다 집을 짓고 소식을 전한다고...

11. 대룡시장: 1960~70년대초 모습, 연안의 시장과 똑같이 만들었다 함.

(12. 교동읍성: 고려때 39년 도읍의 몽골침입 대비한 내성.
13. 교동향교: 고려 인종때 지어진 한국 최초의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조헌,
이황, 이이, 송시열, 정몽주 등의 위패봉안)

14. 삼별초군 호국항몽遺墟(언덕,옛터)비 (망양돈대): 1993년 복원, 삼별초항쟁은 1270년 6월 삼별초 해산령에 불만을 가진 삼별초 장병들이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여원연합군에 대해 펼쳤던 3년간의 항쟁이다. 1270년 무인정권이 종식되자 원종은 몽고의 지시에 따라 개경환도를 단행했다. 환도하면 몽고군의 보복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배중손장군은 삼별초를 규합해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국왕으로 옹립하고 항거했으나 몽골과 관군에 밀려 1000여척의 배로 진도 벽파진, 제주 애월읍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3년 동안 저항했다.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예속화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하여 항거한 병사들의 항쟁이었다. 진돗개와 제주 돌하르방도 있다. 바로 앞 동산이 3명1개조로 경계근무했다는 망양돈대가 있다.
* 삼별초: 야별초(夜別抄),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와 신의군(神義軍)으로 구성

15. 조양방직: 조양방직은 1933년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최초의 인견공장으로, 2017년에 과거 폐공장의 모습 그대로 카페로 탈바꿈 함.

(16. 고려궁지: 고려 고종이 강화도 천도하여 지은 궁궐터를 일부 복원.
17. 외규장각: 이조시대 규장각으로 사용.
18. 성공회 성당: 한국 최초의 성당
19. 용흥궁: 조선25대 철종이 유배거서 살던 집터에 세운 궁.)

20. 돈대(墩臺), 진(鎭), 보(堡) 차이 <돈대: 작은규모의 보루=요새, 堡: 작은성 보, 鎭: 진압할진>

21. 갑곶돈대: 1679년 설치(사적306호), 선정 베푼 67명 관리들 기념비공원, 이섭정 정
자, 조선 영조때 만든 사정거리 700m인 대포, 정묘호란때 방어용으로 심은 400년
된 탱자나무, 아래쪽에 전쟁박물관이 있다.
1866년 고종3년 9월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여 병력으로 갑곶돈대 상륙, 강화산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으나, 10월에 정족산성(삼랑성)에서 양헌수장군
에게 패배하여 달아났다. 임진난후 사용된 대포와 소포가 전시되어 있다. 1977년 박정희대통령이 병인양요 당시 모습으로 복원, 준공식에 참석,

22. 강화 광성보: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처참하게 함락된 후 체계적 방어를 위해 조선 효종9년(1658년) 강화해협 주위에 설치한 12개의 진(5)과 보(7) 중의 하나로 화도
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관할하였다.
무역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온 제너럴셔먼호에 방화하여 미 아시아함대가 1871년 침공한 사건인 신미양요(1871년)때 미국 함대와 사투를 벌여 어재연장군 등 모든 군인 350여명이 전멸하였으며(미군은 해군중위 1명과 수병2명 전사).
이 때 문의 누각과 성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6년에 새롭게 복원하면서 광성보 유적지 안에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순국용사 350여 명을 기리는 신미순의총 등을 함께 만들어 세웠다.

23. 초지진(鎭): 이곳은 병인양요, 신미양요(교전2시간만에 진지파괴), 운요호사건 등의 격전지이다. 특히 1875년 강화 연안을 멋대로 탐색하며 한강하구로 진입하려는 일본 운요호를 초지진에서 포격한 것을 빌미로, 다음해 운요호사건의 배상을 요구하며 고종13년(1876년) 강화도를 침략하여 연무당(현 농협자리 서측)에서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인천, 부산, 원산항을 일본에 개방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했다. 이것이 결국 1905년 을사보호조약(외교권 박탈)으로 이어지고 결국 1910년 한일합병의 근원이 되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때 복원된 초지돈대 안에는 당시 사용했던 대포(홍이포)가 전시되어 있고, 돈대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와 운요호사건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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