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에 잠실나루역에 내려 현대아산병원으로 한참을 걸어서 이동했다.
''나는 그 후배를 보러 걸어가는데 씩씩하던 그는 날 마중나오지 못하는구나.''
초등학교 울타리를 따라 걷는 길에 넝쿨장미가 빨갛게 피었고 어디선가 꽃향기도 날려온다. 조금 가다보니 갑작스런 비로 흘러내린 황토색 물이 배수지에 몰리면서 시큼한 진흙냄새가 콧속에 들어온다. 내코가 생생하구나 싶다.
울타리에 어린이들이 쓴 시가 여럿 걸려 있다. 어느 시 앞에 발길이 멈춰지면서 나를 웃게 만든다. 이런 재미있는 시다.
앞니 두개 뽑았다
대문니가 사라지자
말이 슬슬 샌다
침이 질질 흐른다
웃으면 안되는데
애들이 자꾸만 간지럼 태운다
갑자기 인기 짱이다
입 다물고 도망만 다닌다
콧물 들이마시랴 숨쉬랴
콧구멍만 바쁘다
지금의 내 처지가 어쩌면 어린이와 비슷한 것같아 더 웃음이 난다. 이가 부실하니 발음이 왜 이리 새는지 모르겠다. 똑똑하게 발음하는게 그리 똑똑치 못하다. 말귀도 잘 못알아듣는다고 핀잔받는 일이 많은데 발음까지 그렇다.
액자 속에서 후배가 활짝 웃고 있다. 맞아, 이렇게 웃어도 괜찮은거지. 달라지지 않아. 곧 떠나게 될거라고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야 충격이 크겠지만 누구나 시한부인건 마찬가지야. 3개월일 수도 있고 3년, 30년일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가 작은건 아니지만 그리 크지도 않다. 100년 지나고 되돌아 보면 그럴 것이고 또 당장 손주들에게는 큰 관심사항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나.
지난달 중순경 선배가 동호회카톡방에 문자를 보내왔다.
''삶의 마지막 길에서...!!!
약 2개월간 극한 투병의 끝을 알려야 하는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많은 분들의 기대와 희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조용한 영원의 세계로 옮기고자 합니다. 그동안 삶을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ㅇㅇㅇ 배''
''어 이게 뭔 일이야?''
얼떨떨 해진다. 동호회 선후배들이 답장을 보냈다.
''선배님 한동안 뜸하시어 짧은 소풍길 나서셨는가 했었지요.
겪고 계실 여러 극한의 과정이 느껴져옵니다.
저의 소풍은 아직 진행중인데 사람따라 사정이 있어 먼저 마무리하는 이도 있겠지요. 그런데 끝나고 되돌아 가는 곳은 다 제집, 고향이니 서로 다른 곳이 아닐겁니다.
주로에서 가볍게 달리시던 모습이 꿈결같습니다.
이쪽 언덕이나 저쪽 언덕이나 역시 둘은 아닌데 사람들은 일부러 此岸에서 彼岸으로 건너가고자 애를 쓰지요. 육신으로는 시간 공간의 제약을 받아 몸에 든 영혼이 부자유스러운데 몸이 아니면 영혼이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꿈과 깸이 따로가 아닌 것이 fact이듯 生死역시 따로일 수가 없어요. '一如'입니다.''
-후배 전인구 배-
''성실하고 온화하고 대체의학을 많이 한 후배가 저물어가는 한 삶을 감사하며 맞고 있음을 보면서 존경심을 갖습니다 그 선한 삶!!마지막까지 놓치지마세요. 힘내세요.''
-신건웅-
''늘 마지막 주로에서 격려해 주던 사랑하는 후배야 !
고별인사가 웬 말인가! 그 동안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보냈겠나.
남은 시간 편안이 보내기 비내. 그리고 또 결승선에서 만나세. 자네의 살아있는 고별인사에 경의와 용기에 감사하며 재회하기를 비내.'' -정유희-
답신이 왔다.
''회장님 말씀에 전적 공감하고 있습니다. '一如', 잠 속에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소식이 늦어 죄송합니다.''
며칠 후 마라톤대회 참석 후 후배 몇명이 문병가서 마지막일 것같은 인사를 나누고 왔다. 그리고 열흘 남짓 후에 그 선배는 말씀대로 '잠속에서 이동'해 가시고 우리는 문상을 다녀왔다. 이렇게 오고간 대화와 인사가 아쉬움 속에서도 참 순수하고 아름답게 인상에 남는다. 이렇게 배웅해 줄 선후배 동료친구가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바로 이 순간, 여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오직 눈과 귀와 코와 입으로 느껴지는 것을 아는 '이놈'만 오롯이 있다. '주인공'이라 하기도 하는 '그놈'이다. 이 순간의 면도날 같은 'blade'를 지금 타고 있다. 계속 그 순간은 이어진다. 끊이지 않는 영원이다. 그래서 '長今'이다. 우리 모두는 좋거나 싫거나 그 가파른 날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blade runner'다. 이 자리에는 어떤 것도 붙을 수 없다. 붙는 순간 새로 솟아나는 생명력에 밀려 과거로 가버리고 만다. 時空도 없고 生死까지도 마찬가지다. 머무르지 않으니 잡힐게 아무것도 없다.
''아하, 사람들이 헤메고 찾던 生死一如의 도리가 바로 이 자리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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