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그림 '도교의 신선 장가로'
이 정도면 됐다.
충분히 행복하다.
지금 그리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며
입고 있는 옷도 불편하지 않은
衣食住의 기본이 갖춰져 있지 않은가?
이 외에는 전부 부수적인 것들이다.
그저 좋은 것을 많이 갖고 싶어한다. 꼭 필요하지는 아닌 것들이다.
은행에 있는 내 돈은 그냥 숫자이고 찾아서 쓰는게 내돈일 뿐이다.
돈이나 달러나 '코인'이나 다 숫자다.
스마트폰이 계속 진화된다.
카메라화소가 더 좋아지고
여러 편리한 기능들이 늘어난다.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자동차나 가전제품, 생활용품
우리가 사는 집, 모두가 다 그렇다.
호롱불 아래서도 공부하고
스테이크 돈까스 없었어도 다 맛있게 먹었다
맨발로 사는사람 신발 신으라 하고
이런저런 예쁜 옷도 입으라 하지만
그 이전보다 더 행복해졌느냐?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냥 이 정도로 놔두면 안되나?
집값 땅값 올려 부자만들어 준다고
고마운 일도 아니다.
더 행복한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면 안돼.''
낙오자 안 되려면 계속 뛰어야 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얼마든지 많아.
주변에서 자꾸 부추긴다.
부모와 선생님, 선배, 언론방송, 책이 그렇게 말하고 다구친다.
이런 노후의 꿈을 가진 이들도 있다.
모두가 평생동안 직장과 사업으로 바삐 뛰면서도 가지는 은퇴 후의 꿈은 전원주택에서 여유롭게 사는 미래생활, 앞에 바다가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에서 요트를 타고 낚시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다.
언제 그런 꿈을 실현할 것인가?
지금 그렇게 살 것인가?
나중에 돌고돌아 늙어서 갈 것인가?
예전에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았던 선조들은 처음부터 전원생활, 계속 전원생활, 노동으로 고생은 하셨어도 노후까지 계속 전원생활을 하셨다.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우리 세대는 어릴때 전원생활을 하다가 젊은시절을 외유하며 객지생활을 했고 은퇴 후에 실현되기는 쉽지 않더라도 다시 고향으로 가고싶어 한다.
어린시절 시골생활 경험이 없는 세대라도 편리한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살지만 언젠가의 꿈은 한적한 교외에서 자연과 가까이에서 살고싶어 한다.
위의 3가지 어느 유형에서나 senior가 되면 자연을 벗삼아 살고싶은 꿈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옛 선조들도 정계은퇴 후에 고향에서 정자를 짓고 노년의 풍류를 즐긴 사연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지금 정도의 우리 '생활수준'을 세계에서 볼때 너무 과도하게 앞서 나가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굳이 이만큼 아니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더 발전하고 더 좋고 많은 것을 추구함으로써 계속 부족함을 느끼기 보다는 지금의 수준에서 '吾唯知足, 知足常樂'하며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경제론자들은 세상이 계속 변화, 발전해야 한다고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득을 추구하는 집단은 또 가만히 있어서는 이윤창출 구조가 작동하지 않으니 끊임없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으로 소비자를 현혹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니 이 계속 굴러가는 바퀴를 언제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가 과제이기는 하다. 물론 극에 달하면 되돌아 나오는 cycle이 시작되겠지만 아마 이는 연착륙의 상태로는 되지 않을 듯싶다.
이런 비유를 해보면 어떨까? 호흡법에 관한 비유이다. 평생 쉬는 호흡의 수가 정해져 있다고 가정해 보자. 헐떡거리고 빨리 쉬면 70년 걸릴 것을 의도적으로 가늘고 길게 쉬면 100년까지 쉴 수 있으니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도인술을 수련한 옛 선사들은 일반인들의 1분에 13회정도 호흡을 1분에 1~3회정도 함으로써 4배 정도는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했다.
진리는 반대쪽에 있다.
완전한 행복은 바깥에 있지 않다.
문명의 발전이나 욕구의 충족도 너무 급격하고 많아 넘쳐날 정도가 되면 오히려 감당이 안되고 무언가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하도 사람들이 앞만보고 달려가면서 살고 있어 단원 김홍도가 그린 위의 도교 신선 장과로 그림에서는 아예 나귀에 뒤쪽을 보고 타고 가는 것으로 그려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즉, 사람들이 찾고 있는 완전한 행복은 현상에 있지 않고 본질 속에 있는데 그 본질은 바깥에서 아무리 찾아헤메도 찾을 수 없고 반대편인 자기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 道는 반대쪽에 있다는 것을 이 그림은 보여준다.
반대쪽이다.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을 익게 하라''
(熟處放敎生 生處放敎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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