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금) 09:30 동기회 산호회 12명 판교역에 모여 경강선으로 이천역 이동, 설봉산 8개 봉우리 3시간반 산행
경기도 이천이 무척 멀었는데 경강선 전철 개통 후 서울시내 왕복하는 만큼이나 쉬워졌다. 신분당선 성복역에서 판교역까지 14분, 판교역에서 이천역까지 33분 걸리니 말이다.
이처럼 편리한 여건 갖춘 곳이 대한민국 말고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산행을 하려면 차타고 몇시간 가야 산에 이를 수 있거나 얼마전에 다녀온 대만의 경우는 산이 많아도 산길이 없어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야생동물이 산주인이고 뱀도 많아 산에 다닐 여건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린 어느 산이라도 가면 되고 서울의 경우 도심에서 30여분이내에 산자락에 이를 수 있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왜 이 산에만 왔나 싶게 근교 산마다 산행인파로 산길이 몸살을 앓는다. 건강할때 건강관리 잘 하라는 교훈을 너무나 잘 실천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곳곳의 체육공원, 둘레길, 헬스장 등 운동하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도 성인병이 많고 병원과 의술은 발전하는데 비해 환자는 오히려 더 늘어나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 스트레스가 심한 것도 원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공통적 심리작용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심한 여건인 것같다. 느긋하고 여유롭지 못하고 어느 시대부터인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기보다 언제나 남과 비교하면서 충만하지 못한 방식으로 살고 있어서일게다. 잘 참지 못하고 성질이 조급해지면서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 내맘에 안들면 쉽게 화를 내고 감정의 표출이 상당히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경향이다. 그러니 제 스스로 보고 듣고 하는 것마다 스트레스로 받아들일 꺼리들이 많은 구조가 된다.
외형적인 삶의 여건들은 예전에 비할바가 안되게 향상되었음에도 고마워하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소한 불편에는 불만이 많다. 도로나 교통수단 등 여러 여건들이 좋아져 이동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단축되었으니 그 만큼의 시간이 남아야 하는데 반대로 시간은 더 부족하다 하며 산다. '여유'는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마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간'이란 놈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시계바늘이 돌아가고 있으니 흘러가는 것 같이 보일 뿐 과거의 시간이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다 실체가 없다. 실상은 오직 눈앞에 펼쳐지는 지금의 이 순간 뿐이다. 그 현재의 스크린 위에 과거도 펼쳐지고 미래의 상상도 펼쳐진다. 마치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불러오는 앱이 작동하는 것과 같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나 방금 지나간 일이나 나타나는 곳은 똑같이 현재의 화면위이다.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다 잡을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이 실체는 아니다. 그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얹혀 있는 여러가지 추억들, 때로는 몹시 두렵거나 걱정스럽거나 화나고 미운 감정들까지도 모두 내가 떠올리는 대로 끌어오는 영상자료 화면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하얀 스크린 위에 투사되는 영화의 화면처럼 그렇다.
미래는 또 어떤가? 역시 현재의 화면으로 온갖 상상을 만들어 끌어온다. 그 역시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관념에 불과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그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를 통하는 길밖에는. 이 순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 '전력투구 완전연소'하는 길이 삶을 알차게 사는 길이라 했다. 어떤 일이 보람있고 내 삶의 가치를 최대로 구현해 줄 것인가 하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길이 있기는 할까? 언젠가 이 육신을 버리고 떠날때 가지고 갈 것은 하나도 없는데 뭘 이루었다고 할 것인가? 서산대사가 말씀하셨듯이 生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死는 그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 설파하지 않았던가? 어제까지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한줄기 서늘한 바람에 꼬리도 못남기고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권력이나 돈이나 다 그렇지 않을까?
왜 이처럼 장황하게 시간의 실상을 살펴보느냐 하면 우리들 삶에서 그 허상에 속고 매달리고 하는 경향에서 조금 벗어나 보고자 해서이다.
다들 알고는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소설 '희랍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1885∼1957)의 묘비에는 3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
내일 말고 오늘,
나중에 말고 지금,
매 순간 사는 동안에 이런 충만한 삶이 이어진다면 나는 흔적없는 영원을 살게 되리라.
판교에서 전철타고 여유롭게 이동
어느날 사람이 와서 싹뚝 잘랐다
'어른'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한평생 지나고 보면 '지난 그때 행복한 시절이었네...' 그리 느낄까?
경기도 이천이 무척 멀었는데 경강선 전철 개통 후 서울시내 왕복하는 만큼이나 쉬워졌다. 신분당선 성복역에서 판교역까지 14분, 판교역에서 이천역까지 33분 걸리니 말이다.
이처럼 편리한 여건 갖춘 곳이 대한민국 말고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산행을 하려면 차타고 몇시간 가야 산에 이를 수 있거나 얼마전에 다녀온 대만의 경우는 산이 많아도 산길이 없어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야생동물이 산주인이고 뱀도 많아 산에 다닐 여건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린 어느 산이라도 가면 되고 서울의 경우 도심에서 30여분이내에 산자락에 이를 수 있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왜 이 산에만 왔나 싶게 근교 산마다 산행인파로 산길이 몸살을 앓는다. 건강할때 건강관리 잘 하라는 교훈을 너무나 잘 실천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곳곳의 체육공원, 둘레길, 헬스장 등 운동하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도 성인병이 많고 병원과 의술은 발전하는데 비해 환자는 오히려 더 늘어나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 스트레스가 심한 것도 원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공통적 심리작용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심한 여건인 것같다. 느긋하고 여유롭지 못하고 어느 시대부터인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기보다 언제나 남과 비교하면서 충만하지 못한 방식으로 살고 있어서일게다. 잘 참지 못하고 성질이 조급해지면서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 내맘에 안들면 쉽게 화를 내고 감정의 표출이 상당히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경향이다. 그러니 제 스스로 보고 듣고 하는 것마다 스트레스로 받아들일 꺼리들이 많은 구조가 된다.
외형적인 삶의 여건들은 예전에 비할바가 안되게 향상되었음에도 고마워하기보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소한 불편에는 불만이 많다. 도로나 교통수단 등 여러 여건들이 좋아져 이동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단축되었으니 그 만큼의 시간이 남아야 하는데 반대로 시간은 더 부족하다 하며 산다. '여유'는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시간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마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간'이란 놈은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시계바늘이 돌아가고 있으니 흘러가는 것 같이 보일 뿐 과거의 시간이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다 실체가 없다. 실상은 오직 눈앞에 펼쳐지는 지금의 이 순간 뿐이다. 그 현재의 스크린 위에 과거도 펼쳐지고 미래의 상상도 펼쳐진다. 마치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불러오는 앱이 작동하는 것과 같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나 방금 지나간 일이나 나타나는 곳은 똑같이 현재의 화면위이다.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다 잡을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이 실체는 아니다. 그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얹혀 있는 여러가지 추억들, 때로는 몹시 두렵거나 걱정스럽거나 화나고 미운 감정들까지도 모두 내가 떠올리는 대로 끌어오는 영상자료 화면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하얀 스크린 위에 투사되는 영화의 화면처럼 그렇다.
미래는 또 어떤가? 역시 현재의 화면으로 온갖 상상을 만들어 끌어온다. 그 역시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관념에 불과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그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를 통하는 길밖에는. 이 순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 '전력투구 완전연소'하는 길이 삶을 알차게 사는 길이라 했다. 어떤 일이 보람있고 내 삶의 가치를 최대로 구현해 줄 것인가 하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길이 있기는 할까? 언젠가 이 육신을 버리고 떠날때 가지고 갈 것은 하나도 없는데 뭘 이루었다고 할 것인가? 서산대사가 말씀하셨듯이 生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死는 그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 설파하지 않았던가? 어제까지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한줄기 서늘한 바람에 꼬리도 못남기고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권력이나 돈이나 다 그렇지 않을까?
왜 이처럼 장황하게 시간의 실상을 살펴보느냐 하면 우리들 삶에서 그 허상에 속고 매달리고 하는 경향에서 조금 벗어나 보고자 해서이다.
다들 알고는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소설 '희랍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1885∼1957)의 묘비에는 3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
내일 말고 오늘,
나중에 말고 지금,
매 순간 사는 동안에 이런 충만한 삶이 이어진다면 나는 흔적없는 영원을 살게 되리라.
판교에서 전철타고 여유롭게 이동
어느날 사람이 와서 싹뚝 잘랐다
'어른'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한평생 지나고 보면 '지난 그때 행복한 시절이었네...' 그리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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