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런 시냇물이 있다니...
수년전 왔을때 이랬는데 이번에 가보니 아직 그렇다. 앞으로도 오래 그렇게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 원형이 훼손되니 그대로 되어가는대로 두면 된다.
여름이면 형제간들이 멀지 않은 계곡으로 함께 피서가는데 올해는 양평 용문산 중원계곡으로 갔다. 여동생네가 아침 7시반에 미리 가서 정자하나를 잡아 우리는 뒤에 가서 합류했다.
한갑자가 훌쩍 지났다.
아버지만 다른방(작은방)에 계시고 온 식구가 한방(큰방)에 살았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밥먹고 공부하고 잠자고 엄마 친구분들의 저녁 모임터였다.
여동생이 태어나던 해에 누님은 18세로 혼례식을 올리고 다음해에 시집을 갔다. 자형은 23세인 까만 교복과 모자를 쓴 고3 학생이었다. 어른들끼리 혼사를 정하고 본인들은 혼례식날 처음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20리나 되는 먼길을 매일 걸어 우리 동네앞을 지나 읍내의 고등학교로 다니던 자형은 반대편으로 초등학교에 걸어가던 4학년, 1학년 형제를 보고 저 어린이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례식날 보니 바로 그 형제가 처남들이라 깜짝 놀랐단다. 우리 형님과 나였다. 60여년이 지난 근래에 자형이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어느 산골로 가셨다. 군사우편 찍힌 편지가 오면 내가 읽어드린다. 목이 메어 멈칫거리며 읽는다. 그냥 서러웠다.
누님 자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생들에게 평생의 멘토이시다.
4남매를 두고 손주들까지 모이면 15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루셨다.
막내 여동생
누님이 시집가던 해에 태어났다. 누님 아래로 남동생 셋 다음이다. 언니 오빠들이 잘 챙겨주고 했는데 여동생은 대체로 몸이 성치않아 주변의 애를 태웠다. 쌀이 없어 보리밥을 먹던 시절이었어도 여동생은 쌀밥을 먹게 했다. 집에 키우던 닭이 알을 낳으면 돈되는 것은 다 읍내장에 내다 팔고 어쩌다 한번 달걀 먹을 기회가 있었다. 달걀 빈껍질에 쌀을 넣고 밥솥에 올려놓으면 뻣뻣한 보리밥과는 전혀 다른 하얀 쌀밥이 된다. 여동생에게 그걸 먹게 해도 입이 짧아 식사때마다 투정을 부리고 우리는 그게 부러웠다. 그런 어릴적의 건강상태가 50대까지도 늘 그랬던 것같다. 그런데 회갑을 넘긴 지금은 우리 5남매 중에 최고의 건강상태로 전국 곳곳의 산을 누비고 다닌다. 아마 머지 않아 에베레스트도 오를 기세다.
자녀가 성장한 후 어느때부터 동네 운동장에서 매일 걷기운동을 했고 수년 후부터 평생 붙어다녔던 여러 불편함들이 다 떨어져 나갔단다. 산행모임에 따라나서 뒤에서 처지지 않도록 매제가 도와주어 겨우 따라다닌 정도였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지리산종주 설악산공룡능선 한라산을 비롯하여 전국에 안가본 산이 거의 없고 일본 원정산행도 다녀왔다.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며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하다.
4남매를 두어 손주들 다 모이면 13명의 대가족을 이룬다.
부모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었을 듯싶다. 국가인재가 되거나 문중을 빛내는 인물이 되거나 돈을 크게 벌어 재벌이 되라는 그런 주문을 하지 않으셨다.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이웃에 잘 도와주고,
어려운 일은 남이 하기 전에 내가 하고,
내가 손해보는 듯 살라고 하신 것같다.
조목조목 말씀하시지는 않았어도 생활속에서 실천하고 사셨다.
노인네가 되면 몸은 성치않아 애물덩어리가 되고 전화오는데도 없고, 오라는데도 별로 없고, 자녀들이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일이 계속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한다. 이렇게 우리 형제간 어른들끼리 놀러가서 100원짜리 고스톱도 치고 그렇게 놀면 되지 않겠냐고 농담삼아 제시한다.
예전의 어른들에 비해 우리 세대는 공부도 많이하고 나이도 지긋한데 자녀와 후세대에 어른으로서 어떤 멧세지를 전해주고 있는지도 살필 일이다.
수년전 왔을때 이랬는데 이번에 가보니 아직 그렇다. 앞으로도 오래 그렇게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 원형이 훼손되니 그대로 되어가는대로 두면 된다.
여름이면 형제간들이 멀지 않은 계곡으로 함께 피서가는데 올해는 양평 용문산 중원계곡으로 갔다. 여동생네가 아침 7시반에 미리 가서 정자하나를 잡아 우리는 뒤에 가서 합류했다.
한갑자가 훌쩍 지났다.
아버지만 다른방(작은방)에 계시고 온 식구가 한방(큰방)에 살았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고 밥먹고 공부하고 잠자고 엄마 친구분들의 저녁 모임터였다.
여동생이 태어나던 해에 누님은 18세로 혼례식을 올리고 다음해에 시집을 갔다. 자형은 23세인 까만 교복과 모자를 쓴 고3 학생이었다. 어른들끼리 혼사를 정하고 본인들은 혼례식날 처음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20리나 되는 먼길을 매일 걸어 우리 동네앞을 지나 읍내의 고등학교로 다니던 자형은 반대편으로 초등학교에 걸어가던 4학년, 1학년 형제를 보고 저 어린이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례식날 보니 바로 그 형제가 처남들이라 깜짝 놀랐단다. 우리 형님과 나였다. 60여년이 지난 근래에 자형이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어느 산골로 가셨다. 군사우편 찍힌 편지가 오면 내가 읽어드린다. 목이 메어 멈칫거리며 읽는다. 그냥 서러웠다.
누님 자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생들에게 평생의 멘토이시다.
4남매를 두고 손주들까지 모이면 15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루셨다.
막내 여동생
누님이 시집가던 해에 태어났다. 누님 아래로 남동생 셋 다음이다. 언니 오빠들이 잘 챙겨주고 했는데 여동생은 대체로 몸이 성치않아 주변의 애를 태웠다. 쌀이 없어 보리밥을 먹던 시절이었어도 여동생은 쌀밥을 먹게 했다. 집에 키우던 닭이 알을 낳으면 돈되는 것은 다 읍내장에 내다 팔고 어쩌다 한번 달걀 먹을 기회가 있었다. 달걀 빈껍질에 쌀을 넣고 밥솥에 올려놓으면 뻣뻣한 보리밥과는 전혀 다른 하얀 쌀밥이 된다. 여동생에게 그걸 먹게 해도 입이 짧아 식사때마다 투정을 부리고 우리는 그게 부러웠다. 그런 어릴적의 건강상태가 50대까지도 늘 그랬던 것같다. 그런데 회갑을 넘긴 지금은 우리 5남매 중에 최고의 건강상태로 전국 곳곳의 산을 누비고 다닌다. 아마 머지 않아 에베레스트도 오를 기세다.
자녀가 성장한 후 어느때부터 동네 운동장에서 매일 걷기운동을 했고 수년 후부터 평생 붙어다녔던 여러 불편함들이 다 떨어져 나갔단다. 산행모임에 따라나서 뒤에서 처지지 않도록 매제가 도와주어 겨우 따라다닌 정도였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지리산종주 설악산공룡능선 한라산을 비롯하여 전국에 안가본 산이 거의 없고 일본 원정산행도 다녀왔다.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며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하다.
4남매를 두어 손주들 다 모이면 13명의 대가족을 이룬다.
부모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었을 듯싶다. 국가인재가 되거나 문중을 빛내는 인물이 되거나 돈을 크게 벌어 재벌이 되라는 그런 주문을 하지 않으셨다.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이웃에 잘 도와주고,
어려운 일은 남이 하기 전에 내가 하고,
내가 손해보는 듯 살라고 하신 것같다.
조목조목 말씀하시지는 않았어도 생활속에서 실천하고 사셨다.
노인네가 되면 몸은 성치않아 애물덩어리가 되고 전화오는데도 없고, 오라는데도 별로 없고, 자녀들이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일이 계속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한다. 이렇게 우리 형제간 어른들끼리 놀러가서 100원짜리 고스톱도 치고 그렇게 놀면 되지 않겠냐고 농담삼아 제시한다.
예전의 어른들에 비해 우리 세대는 공부도 많이하고 나이도 지긋한데 자녀와 후세대에 어른으로서 어떤 멧세지를 전해주고 있는지도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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