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8(일) 1030, 국방부원광사에서 지장재일 법회

갑진년 새해 타종식을 하고 달력을 바꾼지 엊그제 같은데 한달이 지나고 있다.

이런 아재개그가 있다.
세상에 가장 빠른 새는? 눈깜짝할새
그보다 더 빠른 새는? 금새
또 그보다 더 빠른 새는? 어느새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한시가 더 소중하다. 소중한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까? 가장 우선적인 곳이다. 지금에 와서 부귀영화를 추구할 일도 아닐 것이다. 건강하게 장노년을 살아갈 수 있다면 별로 걱정할 일이 없을 듯싶다. 누구나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보다 더 쉬운 길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하는 길이다.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인생의 목표를 '행에 둔다면 행복하지 않은 것과의 상대적인 관계로 인해 이리저리 걸리는게 많아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어렵게 된다. 삶의 목표를 '해탈'에 두면 모든 삶의 방향이 바른 쪽으로 가게 될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되니까 삶에 큰 흔들림이 없게 된다.

장노년의 소중한 시간을 '해탈'의 훈련시간으로 삼으면 좋겠다. 일요일마다 주지법사께서 그 길을 부처님 정법을 바탕으로 알기쉽게 설해 주신다.

<주지 원경법사 법문요지>

'깨진 항아리' 법문

금이 가서 물이 새는 항아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물을 길을 때마다 주인은 굳이 그 항아리를 가져갔다. 항아리는 귀한 물을 줄줄 새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사용해 주는 주인이 고맙기도 해서 주인에게 물었다.
"왜 저같이 쓸모없는 깨진 항아리를 사용해 주시나요?"
주인이 대답했다.
"네가 그동안 걸어 왔던 길을 돌아봐라."
깨진 항아리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예쁜 들꽃이 길가에 가득 피어 있었다.

주인이 말했다.
"네가 그동안 흘려 준 그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세상 일들이 계획된 각본대로, 관례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도 집착이 아닌가?
꼭 그렇게 해야하나?
본질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지 않겠나?

여건은 예전보다 훨씬 편리해지고 윤택해졌는데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관습에 머물며 집착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32상을 갖추신 완전한 모습으로 나투셨다. 이는 이전에 쌓인 공덕이 나타난 결과의 모습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다른 이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사람마다 여건이 다르다.

법사가 출가 후 초기에 2년여동안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공부, 수행에 전념하면서 살았다. 이후에 친구들과 소식을 주고 받는 기회가 되면서 느꼈던 점은:
다른 이들에 비해 내가 전념했던 삶이 별것 아닌것 같이 여겨지고 가치가 무너지게 되더라. 그 순간에 우울감이 밀려온 적이 있다. 또 반대로 '나는 이렇게 수행했는데'하는 교만한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거나 다 고정관념의 결과라 하겠다.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으면 언제나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된다.

금이 간 항아리를 이고 다닌 주인 할머니의 소중한 마음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모르고 있는 가치,
누군가에게는 그게 가치가 있는 일일 수가 있는 그런 따뜻한 안목을 넓혔으면 좋겠다.

출가하여,
1,2년내에 성불하겠다는 열성으로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분들은 대체로 6개월 버티기가 어려운 경우를 많이 본다.
불교는 이거다 하는 틀이 있는게 아니다.
이전에 했던대로 하는게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
'無有定法'이라고 한 부처님의 뜻을 잘 되새기자.

바라밀합창단


2월4일 일요일 입춘기도에는 엄청 많은 불자들이 큰법당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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