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58>
'텅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니 애써 마음쓸 일이 없다'
텅비어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게 아니라 다 갖추고 있다. 있다고 하려니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없다고 하려니 거기에서 모든게 나오니 없다고도 할 수 없다(眞空妙有).
내 삶에 태클 거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내가 고난이고 장애물이라고 여길 탓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와 비교하여 많다 적다 좋다 좋지 않다 등 상대적으로 분별해서 본다. 좋은 것은 탐내고 싫은 것은 피하고 미워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구조속에서 살고 있다.
꿈속에서는 온갖게 다 있는것 같지만 깨고 보면 아무 것도 없다.
남자들은 군생활 꿈을 잘 꾼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당시의 인상과 충격이 커서 무의식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고교때 수능, 대입공부에 전념하던 꿈도 많이 꾼다. 아마 압박감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깨고 나면 그 압박감이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어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매일 꿈을 꾸게 하여 그 꿈을 깨고 나면 모든게 망상이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꿈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삶은 분명히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산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어제의 내 삶은 어디로 갔고 수십년 과거는 다 어디로 갔나? 어제밤 꿈처럼 다 지나가고 없다. 오늘 살고 있는 이 삶도 또한 깨고 보면 다 꿈이기는 마찬가지다.
너무 애써서 마음쓸 필요도 없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다. 괴로운 일도 내가 애쓴다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시간, 상황이 지나면 저절로 조금씩 무디어진다.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너무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가 쌓이는 경우, 기억상실증으로 그간의 특정기억이 사라져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스트레스의 기억이 사라지니 편안해진다.
괴로움 문제뿐만 아니라
내 삶을 되돌아보면 내가 애써서 된 것보다 인연따라 일어난 경우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애쓰지 않아도 된다. 예를들면 숨쉬는 것, 오장육부가 활동하는 것이나 먹는 것 등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되니 사는데는 문제가 없다.
본질적인 것들은 대부분 잘 되고 있는데 부수적인 것으로 애쓰는게 많은 것이 현실이다. 돈버는 것. 학교, 직장 등등.
'에고'의 특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너무 미워할게 없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에고'를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키고 있다. 자기 에고 챙기는 일은 당연한 일 아닌가? 사람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집착심은 비슷하다. 당연히 그러겠거니 해야지 너무 미워할게 없다.
집착없이 일을 하면 스트레스를 덜받게 되고 일이 오히려 잘된다. 무한한 가능성이 발현된다. 집착하면 그것만 보인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막힌다. 지식으로 일을 하지 지혜의 문이 열리지 않게 된다.
'아상, 에고'를 내려놓아야 지혜의 문이 열린다.
'나'라는 경계선이 사라지면 내가 법신부처님이 된다. 아상에 갇힌 의식이 사라지고 전체가 '나'가 된다. 무한한 에너지가 솟아난다. 삶을 즐겁게 살게 된다. 집착을 내려 놓으면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온다.
''모짜르트가 나와 둘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연주를 하면 그렇게 된다.
''내가 수학교수다''라고 생각하며 명상을 하고 수학시험을 보면 성적이 오른다.
집착없이 일을 하면 스트레스 없이 일하게 된다.
교구장님 축사를 쓴 일이 있었는데 그때 어떻게 쓰야할지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후의 어느 기회에 어느 축사를 검토해달라고 하여 가볍게 받이들이니 부담이 없어지고 그냥 잘 써지더라. 잘해야겠다는 생각없이 하면 힘도 안들고 더 잘된다.
<신심명 59>
'사량분별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의식과 감정으로는 측량이 어렵다'
불법은 인과법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미 이 자리에 펼쳐져 있다. 노력을 해서 결과를 얻는 것은 인과법이다. 운동선수, 공부, 수행, 신통력 등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원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그런데 '불법'은 이미 갖춰진 것이지 노력해서 얻는게 아니다.
수행도 방편이다. 방편까지도 버려야 깨달음이 일어난다. 교리도 다 방편이다. 경전교리를 열심히 해서 논리적으로 정리한다고 이르는 경지가 아니다. 이마저도 다 방편이다.
<신심명 60>
'참되고 여여한 진여법계는 남도 나도 없다'
내 꿈속의 나와 남은 둘이 아님과 같다.
귀가 듣는다면 잠들어서도 들려야 하는데 아니다. 눈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부처 '일불성'이 나를 통해 듣고 보고 하는 것이다. 보고 듣는 순간에 우리는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부처님에게는 어떤 욕도 욕이 되지 않는다. 욕도 다만 지나가는 소리에 불과하다
<신심명 61>
'재빨리 상응하고자 한다면 오직 不二法만을 말하라'
법문을 들을때 二法을 설하는지 不二法을 설하는지 보면 바르게 법문을 듣게 된다. 방편을 강조해도 방편을 버려야 한다. 뭔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것도 二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二法' 듣기를 더 좋아하고 또 二法이라야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쉽기도 하다. 돈버는 것, 성공하는 것 등을 이야기해야 솔깃하는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불이법에 집착해도 그게 이법이 되고 만다.
'저놈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은 내 속에도 저놈같은 마음이 없지 않다.
배고프던 초등시절의 아픈 경험
어떤 친구가 수퍼에서 훔쳐온 과자를 얻어먹었는데 그 다음번에는 순진한 내가 훔쳐오다가 들켜 붇잡혀 난리친 적이 있다. 일생일대의 큰 충격이었다. 어떤 미운놈도 내가 일으킨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되면 그리 미워할 일도 없어진다.
내가 포용하지 못할 만큼 내가 옹졸한 존재는 아니다.
좋은 일 싫은 일 괴로운 일 다 수용, 포용할 수 있다.
괴로움을 줄이는 법은 괴로움속으로 뛰어들어 하나가 되어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적으로 두고 괴로움을 없애려고 할게 아니라 '인연따라 나한테 온 손님이구나' 생각하며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고통이나 병이 와도 마찬가지이다. 손님이라고 받아들여 잘 지내도록 해야 한다. '가난'이 오면 가난을 받아들이고 배고프면 배고픔을 받아들여라.
강원도 양구로 근무지가 발령났던 적이 있었다. 남들은 오지로 가게 되었다고 위로해 주었는데 나는 오히려 자연속으로 가까이 가게 된다는 마음에 무척 설레고 행복해 했었다. 철책 GP방문까지도 즐거웠다.
괴로움이나 병,
이들까지도 없애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오히려 빨리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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