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말에 개봉되면서 대흥행이 기대되었던 영화인데 역사왜곡에 관한 시비로 여러 상영관 동시상영이 안되고 서울의 두어군데 극장에서 하루 한번정도 상영이 되는 영화 '나라말싸미'. 겨우 상영관을 찾아 우리가 필요한 시간대에 맞는 곳이 유일하게 종로3가에 위치한 서울극장이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건국되고 모든 관료들이 그 학문을 공부하여 공직에 진출함으로써 학문적, 철학적 바탕이 되었던 조선사회가 건국되어 3대왕이 지나고 4번째 세종조에서 한글창제와 관련된 스토리를 정사와 야사를 묶어 영화화했다. 여기에 이념적요소는 없고 역사적 사실과 예술성이 있는데 어느 단체에서 시비를 거는 모양이다.
지금보다도 더 합리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왕과 신하들이 소통을 했고 의사결정을 했다고 한다. 특히 세종은 온 백성의 처지를 항상 배려하는 정책을 폈다. 예를 들면 노비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그 남편의 휴가기간까지도 명시하여 보장토록 할 정도였다. 세종대왕의 그런 심성에서 일반 서민들이 배우기 어려운 한자 대신에 소리나는대로 읽고 쓸 수 있는 쉬운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동기가 일어났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종무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했고 국력이나 문화수준이 높았던 시기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세종조의 조선의 국력수준은 백성들의 삶의 수준과 구매력 등의 통계를 비교해 볼때 세계 20위권 정도였다는 보고도 있다. '崇儒抑佛'정책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 국교였고 왕의 國師까지 두어 국가의 중요한 일에 나라의 어른으로 자문역할을 했던 불교가 조선에서는 산속으로 밀려났다. 그런 분위기에서 일본이 조선에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요청을 해와 조정이 불편을 겪고 있을때 팔만대장경을 관리하던 신미스님이 일본사절단을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불교에서 하는 염불소리를 들은 세종이 그 소리를 글로 써보라 한다. 산스크리스트어로 쓰는데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조정의 신하들은 서민들이 글을 알게되면 양반과 성리학이 불편해질 거라 하고 왕이 불교를 가까이 하는 것까지 반대한다.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儒子도 佛子도 다 내 백성이요 선비나 일반백성이 다 내 백성이라 선비뿐만 아니라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문자가 필요한 것이라고 극렬히 문자창제를 반대하는 신하를 설득해 나갔다. 국가지도자의 마음가짐과 마음씀이 한마디 한마디에 넘쳐흐르는 존경스런 모습이었다.
팔만대장경 속에 있는 산스크리스트 소리글자보다 쉬운 문자를 찾았을 것이고 그 중에 단군시대부터 있었던 가림토문자도 참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러 정성들이 모여 초안이 완성되었고 이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앞으로도 정책으로 계속 추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집현전 유생들의 호응이 있어야 하고 조정의 신료들을 설득하는게 세종의 역할이었다. 집현전에서 문자의 제목을 붙이고 서문을 쓰게하여 정인지가 썼다. 세종은 '언문'으로 하자는 의견이었는데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이라고 정하고 해설서까지 정리하게 하여 드디어 반포했다.
훌륭한 선조들이 어려운 과정을 거쳐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최고의 과학적문자, 한글덕분에 우리는 의사소통과 정보를 쉽게 교류하면서 글로 자료를 정리하고 정보화시대에 가장 적합하게 활용하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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