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제들이 태어나서 살았던 고향집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흙벽과 뼈대는 그대로이고 초가지붕 대신 기와모양의 칼라강판, 아궁이 온돌 대신 보일러난방에다 작은 수세식 화장실 하나를 덛붙였다. 툇마루 끝 처마아래로 창틀을 설치하여 마루까지 실내가 되게 했다.
어릴적 살았던 안방에 가보면 70년 흐른 세월이 꿈만 같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정을 올려다 보면 대들보와 서까레가 그대로이다. 올려다 보는 내 눈도 내몸의 그 자리인데 나만 달라졌나 싶고 수십년 시간을 갑자기 건너뛴 듯도 하다. 집도 마당도 나무들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만 변한것 같이 느껴진다.
"용구야! 바지개에 거름지고 바드리밭에 가봐라. 호메이 갖고 가서 아부지 일 도우고 오이라"
두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자그마한 지게 하나씩 지고 귀안논으로 이어지는 뚝방길 따라 밭에 가서 일하고 어둑해지면 집에 와서 밥먹고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한다. 엄마 친구분들이 저녁마다 우리방에 모인다. 긴 담뱃대에 풍년초 담배를 재어 호롱불로 불을 붙여 피우면 방안에 연기가 가득하고 눈이 맵다. 그 방에서 대여섯 식구가 먹고 자고 공부하고 놀고 다했다. 크기는 작아도 '큰방'이라 불렀다.
어머니 회갑이셨던 1978년
어른들 살아계실 적에 한번 모이자고 대구로 장소를 잡아 서울, 부산에서 모였다. 서울에서 형제간 7명 내려가고 부산, 대구에서 7명이 오셨다. 이산가족 만난듯 반갑다. 저녁식사 하고 방2개에 함께 하룻밤을 지냈다. 서울 누님내외, 부산 사촌누님, 모두 80을 넘어 서로 못볼줄 알았는데 동생 주선덕분에 만나게 되었다고 무척 고마워하신다.
이산가족 만나듯한 반가움에
일제시대에 독립정신 선양활동을 하시다가 일본순사에 체포되어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당시 행적을 증언할 유일한 분이 19살인 1942년에 시집와서 어른들 모셨던 사촌형수이시다. 육성으로 증언을 녹취해 두었다. 재판이나 수감기록들이 형무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여 국가기록보존소에도 자료가 없다. 보훈신청을 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 다방면으로 일본으로까지 자료확인 요청을 해볼 참이다.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가족 친지보다 자주 만나는 친구나 직장동료나 이웃사촌들이 있다. 내 삶을 결정지어 주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농경시대에는 가족 수가 곧 생산수단인 일꾼인 동시에 입 하나가 식량소비가 늘어나는 요인이기도 했다. 밥만 먹여주면 남의 집 어떤 일이라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고 갑자기 손님이 집에 찾아와 식사를 하게되면 식구중에 누군가가 밥을 줄여야 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어릴때 그랬다.
수십년의 회포를 하룻밤새에 풀고 생전에 또 언제 만날 수 있으려나 아쉬움속에 헤어짐이 뒤따른다. 그래서 이런 고통을 '愛別離苦'라 했나 보다. 누구나 언젠가는 다 헤어진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남들은 물론이고 자기로 삼아 평생 애지중지 챙겨주고 살았던 이 몸뚱이와도 헤어지는 날이 올 수밖에 없다. 시간상으로 누가 먼저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오래 지나고 보면 그 차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리 집착할게 못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삶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헤어지고 떠나고 사라지고 하기 때문에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나오게 되어 세상은 매일 매순간 신선함이 유지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순간순간 계속 새롭게 솟아나와 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70년 전의 시간과 어제의 시간을 비교해보면 다 붙잡을 수 없는 '幻'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이라고 하는 이 순간까지도 잡으려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려 10년, 100년 전과 다르지 않게 역시 '幻'이 되고 만다. 어제 밤, 꿈속에 너무나 생생했던 어떤 장면들도 잠에서 깨어나고 보면 아무것도 잡을게 없는 것처럼 현상에서의 지나간 시간들도 그리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현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감촉으로 만져지는 무게감이 있으니 그리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어떤 꿈이나 현상도 다 현재의 바탕 스크린에 나타나고 있다. 10년전의 기억도 어제의 일도, 또 꿈속의 일까지도 내 기억을 통해 방금 새로 나타나는 그 스크린 바탕위에 나타나온다. 그 바탕에는 다행히도 이전의 흔적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언제나 깨끗하다. 그 바탕은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도 않으며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확실하게 있고 아마 영원히 있게 되지 않겠는가?
나한테만 그런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그렇다. 그러니 그 바탕 스크린이 내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것이 아니니 내 몸이 떠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 먼 조상님들도 그 바탕위에 계셨고 우리 후손 또한 그럴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계속 쓰고 있어서 내것인 줄로 알고 있었던게 착각이었다. 다리밑에서 주어온(拾得) 이 몸뚱이가 그걸 쓰고 있었던 거였구나 알게 된다.
"그래, 과거 현재 미래는 다 '幻'이고 오직 實在하는 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현재, 늘, 오~늘이 있을 뿐이구나."
이제 이 소식을 알면 걱정할것 없이 두다리 쭉뻗고 편안하게 쉴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벗어나려 해도 한순간, 한발자국도 '이 자리'를 벗어난 적도,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시간과 공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아는 바로 '그 자리'
지하철 환승하는 곳으로 도착하는데 5초가 늦어 출입문이 닫히는 경우가 있고 내가 도착할 즈음 지하철이 마악 도착하는 경우도 있어 재수있다 없다 생각하지만 내일 지나고 되돌아 보면 아무일도 아니다. 하늘이 무너질것 같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무열회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
흙벽과 뼈대는 그대로이고 초가지붕 대신 기와모양의 칼라강판, 아궁이 온돌 대신 보일러난방에다 작은 수세식 화장실 하나를 덛붙였다. 툇마루 끝 처마아래로 창틀을 설치하여 마루까지 실내가 되게 했다.
어릴적 살았던 안방에 가보면 70년 흐른 세월이 꿈만 같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정을 올려다 보면 대들보와 서까레가 그대로이다. 올려다 보는 내 눈도 내몸의 그 자리인데 나만 달라졌나 싶고 수십년 시간을 갑자기 건너뛴 듯도 하다. 집도 마당도 나무들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만 변한것 같이 느껴진다.
정지(부엌)에서 엄마 말씀이 들려오는 듯하다.
"용구야! 바지개에 거름지고 바드리밭에 가봐라. 호메이 갖고 가서 아부지 일 도우고 오이라"
두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자그마한 지게 하나씩 지고 귀안논으로 이어지는 뚝방길 따라 밭에 가서 일하고 어둑해지면 집에 와서 밥먹고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한다. 엄마 친구분들이 저녁마다 우리방에 모인다. 긴 담뱃대에 풍년초 담배를 재어 호롱불로 불을 붙여 피우면 방안에 연기가 가득하고 눈이 맵다. 그 방에서 대여섯 식구가 먹고 자고 공부하고 놀고 다했다. 크기는 작아도 '큰방'이라 불렀다.
어머니 회갑이셨던 1978년
같은 동네에 면서기였던 큰집 사촌형님이 살았다. 형수는 엄마보다 6살 아래로 장조카는 나보다 5살 위이다. 96세인데도 아직 건강한 사촌형수님. 내가 어릴적 나에게도 말을 놓치 않고 '큰되름, 작은되름'이라 부르셨다. 장조카는 지금도 나를 '아재'라 부르며 존댓말을 쓴다.
어른들 살아계실 적에 한번 모이자고 대구로 장소를 잡아 서울, 부산에서 모였다. 서울에서 형제간 7명 내려가고 부산, 대구에서 7명이 오셨다. 이산가족 만난듯 반갑다. 저녁식사 하고 방2개에 함께 하룻밤을 지냈다. 서울 누님내외, 부산 사촌누님, 모두 80을 넘어 서로 못볼줄 알았는데 동생 주선덕분에 만나게 되었다고 무척 고마워하신다.
이산가족 만나듯한 반가움에
단체 기념촬영부터
지난 설에 고향 성묘 다녀오는 길에 대구 사촌형수 인사드리고 할아버지 행적 녹취를 위해 찾아뵈었더니 96세 연세에도 너무 정정하시다. 모임 주선해도 되겠다 싶어 청명한식 고향방문도 겸하여 토요일 저녁 모임을 가진 것이다.
일제시대에 독립정신 선양활동을 하시다가 일본순사에 체포되어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셨던 할아버지에 대한 당시 행적을 증언할 유일한 분이 19살인 1942년에 시집와서 어른들 모셨던 사촌형수이시다. 육성으로 증언을 녹취해 두었다. 재판이나 수감기록들이 형무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여 국가기록보존소에도 자료가 없다. 보훈신청을 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 다방면으로 일본으로까지 자료확인 요청을 해볼 참이다.
만나고 또 헤어지고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가족 친지보다 자주 만나는 친구나 직장동료나 이웃사촌들이 있다. 내 삶을 결정지어 주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농경시대에는 가족 수가 곧 생산수단인 일꾼인 동시에 입 하나가 식량소비가 늘어나는 요인이기도 했다. 밥만 먹여주면 남의 집 어떤 일이라도 했던 그런 시절이었고 갑자기 손님이 집에 찾아와 식사를 하게되면 식구중에 누군가가 밥을 줄여야 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어릴때 그랬다.
수십년의 회포를 하룻밤새에 풀고 생전에 또 언제 만날 수 있으려나 아쉬움속에 헤어짐이 뒤따른다. 그래서 이런 고통을 '愛別離苦'라 했나 보다. 누구나 언젠가는 다 헤어진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남들은 물론이고 자기로 삼아 평생 애지중지 챙겨주고 살았던 이 몸뚱이와도 헤어지는 날이 올 수밖에 없다. 시간상으로 누가 먼저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오래 지나고 보면 그 차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리 집착할게 못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삶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헤어지고 떠나고 사라지고 하기 때문에 또 새로운 것이 나타나오게 되어 세상은 매일 매순간 신선함이 유지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순간순간 계속 새롭게 솟아나와 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70년 전의 시간과 어제의 시간을 비교해보면 다 붙잡을 수 없는 '幻'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이라고 하는 이 순간까지도 잡으려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려 10년, 100년 전과 다르지 않게 역시 '幻'이 되고 만다. 어제 밤, 꿈속에 너무나 생생했던 어떤 장면들도 잠에서 깨어나고 보면 아무것도 잡을게 없는 것처럼 현상에서의 지나간 시간들도 그리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현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감촉으로 만져지는 무게감이 있으니 그리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어떤 꿈이나 현상도 다 현재의 바탕 스크린에 나타나고 있다. 10년전의 기억도 어제의 일도, 또 꿈속의 일까지도 내 기억을 통해 방금 새로 나타나는 그 스크린 바탕위에 나타나온다. 그 바탕에는 다행히도 이전의 흔적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언제나 깨끗하다. 그 바탕은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도 않으며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확실하게 있고 아마 영원히 있게 되지 않겠는가?
나한테만 그런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그렇다. 그러니 그 바탕 스크린이 내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내것이 아니니 내 몸이 떠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 먼 조상님들도 그 바탕위에 계셨고 우리 후손 또한 그럴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계속 쓰고 있어서 내것인 줄로 알고 있었던게 착각이었다. 다리밑에서 주어온(拾得) 이 몸뚱이가 그걸 쓰고 있었던 거였구나 알게 된다.
"그래, 과거 현재 미래는 다 '幻'이고 오직 實在하는 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현재, 늘, 오~늘이 있을 뿐이구나."
이제 이 소식을 알면 걱정할것 없이 두다리 쭉뻗고 편안하게 쉴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벗어나려 해도 한순간, 한발자국도 '이 자리'를 벗어난 적도,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시간과 공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아는 바로 '그 자리'
지하철 환승하는 곳으로 도착하는데 5초가 늦어 출입문이 닫히는 경우가 있고 내가 도착할 즈음 지하철이 마악 도착하는 경우도 있어 재수있다 없다 생각하지만 내일 지나고 되돌아 보면 아무일도 아니다. 하늘이 무너질것 같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무열회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숙박
이튿날 아침의 헤어짐은 2군사령부 무열사 앞 팰구나무 아래에서
8~90 할머니들이 금방 소녀가 된다
언제 또 만나게 될꺼나...
고향 선산 성묘 비탈길을 끌고 밀고ㅡ
고향집 잠시 들러 안밖으로 정리하고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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