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임금시대 태평성대를 이끌어낸 현명한 왕비이야기

○ 유래: 고대(古代) 중국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가(樞歌)했다는 요순시대(堯舜時代)의 이야기이다.

요 임금이 민정시찰(民政視察)을 나갔다. 만백성이 길가에 부복(府伏)하여 왕의 행렬에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고 왕에게 무한한 존경(尊敬)과 복종(服從)의 뜻을 보였다. 그런데 기현상(奇現象)이 발생했다.

길가 뽕밭에서 뽕을 따는 처녀가 부복(府伏)은 고사하고, 한 번도 돌아보지도 않고 열심히 뽕만 따고 있는게 아닌가? 한 마디로 왕의 권위(權威) 따윈 알 바 없다는 일종의 배반행위(背叛行爲)였다.
"어가(御駕)를 멈춰라"
왕명에 따라 천지를 흔들던 악대도 음악을 중단(中斷)하고, 화려한 행렬(行列)이 제자리에 섰다.
"어떤 놈이라고 생각하는가?"
친위대장(親衛大將)이
"촌구석의 뽕따는 무식한 처녀인 줄 아뢰옵니다. 소신(小臣)이 가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왕의 눈에는, 처녀의 자태(姿態)가 너무나 아름다워 거의 환상적(幻想的)이었다. 선녀(仙女) 가 아니고선 어떻게 저리도 곱고 매혹적(魅惑的)일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다. 내 좀 걷고 싶 던 차에 잘 됐다."
왕이 직접 뽕따는 처녀에게로 위풍당당(威風堂堂)하게 걸어갔다. 가까이 왕이 왔는데도 처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뽕만 따고 있었다. 왕은 은근히 자존심(自尊心)이 상했다.
"너는 나의 백성(百姓)이 아니란 말이냐? 왕이 너를 찾아왔다."
그때서야 이 처녀는 몸을 돌려 정중히 목례(目禮)를 했다. 그 순간 왕은 크게 실망(失望)을 했다. 아무리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영애(令愛)라도 왕이 손만 잡으면 왕의 것인데, 이 여인은 통 그러고 싶질 않았다. 처녀의 얼굴에 보기에도 민망(閔陶)한 혹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왕은 슬그머니 객기(客氣)가 발동했다.
"그래, 만백성이 짐을 우러러 경의를 표하고, 땅에 부복하여 순종(順從)의 뜻을 보이거늘, 너는 어쩐 연고(故)로 부복(俯伏)은 고사하고, 아예 오불관언(吾不關焉) 한단 말이냐?"
그러자 이 뽕녀(桑女)의 입에서 참으로 아름답고 당당한 음성(音聲)이 흘러나왔다.
''보천지하(普天地下), 막비왕토(莫非王土), 막 비왕신(莫非王臣), 동서남북(東西南北), 무사 불복(無思不服),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 끝까지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습니 다. 어지신 왕에겐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어느 백성이고 심복(心腹)치 않은 자가 없습니다. 만 백성의 어버이에게 부복(府伏)하는 일만이 경의(敬意)가 아니고, 부모의 뜻에 따라 소임(所任)에 충실함이 더 충성(忠誠)스러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부모가 뭣이 그리 대단한가?"
''효즉(孝卽) 만행지본(萬行之本) 혜아무강(惠我無疆) 자손보지(子孫保之) 백선위효선(百善爲孝先), 효는 만행(萬行)의 근본이며 모든 선행(善行)중에서 으뜸인데 은혜가 무한하여 자손은 영구히 받들어야 하고 군왕이 마땅히 그 모범(模範)을 보이셔야 하거늘 어찌 이를 탓하려 하시옵니까?"

왕은 감탄(感歎)하여 절로 미소(微笑)가 피어 올랐다. 요것 봐라. 날 가르치고 있다. 하! 고것 참 기이(奇異)하구나!

왕은 첫번째 질문(質問)에서 크게 감탄하여 두번째 질문을 하기로 했다.

"넌 헌데, 얼굴에 혹이 달려 창피하지 않으냐?"
"신체발부(身體髮膚)는 하늘이 부모님을 통해 주신 은사(恩賜)이오며, 하늘의 뜻은 삼라만상(參羅萬像)을 다스리는 것이온데, 어버이이신 왕께서 어쩐 연고(緣故)로 소녀의 생김새를 조롱(廟弄)하시옵니까? 이인치인(以人治 人) 인간의 도로써 인간을 다스려야 하고, 외양 (外樣)보다는, 내면(內面)의 진실(眞實)을 존중(尊重)해야 하는 줄 아옵니다."

왕은 더욱 놀라 신하 중에 이런 어질고 현명(賢明)한 신하가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왕은 그래서 내친 김에 엉뚱한 질문(質問) 한개를 더 해보았다.
"너를 내 왕비(王妃)로 삼고 싶다. 날 따라 가겠느냐?"

뽕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斷乎)하게 말했다. "백성들에게 학문(學問)보다는 예를 먼저 가르치셔야 하고 재리(財利)보다는 도리(道理)를 먼저 가르치시는 것이 군왕(君王)의 도(道)라고 생각하옵니다. 대왕(大王)께서 그럴 뜻이 있으시면 나라의 질서(秩序)를 지키고 예도(禮道)를 가르치시기 위해 당연히 먼저 양친의 동의(同意)를 구한 다음 혼서(婚書)를 보내시고 예법(禮法)이 정한 바에 따라 가장 모범(模範)이 되는 절차(節次)를 준행(遵行)함이 마땅한 줄 아온데 어이하여 소녀를 노상납치(路上拉致)하려 하시옵니까?"

왕은 크게 감탄(感歎)했다. 실로 말씨름에서 왕이 패(敗)한 기분이 들 정도(程度)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 넓은 하늘 아래, 누가 감히 왕인 나에게 저렇게 의롭고 유식(有識)한 도리(道理)를 당당하게 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인(義人)이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심입인야(心入人也) 여시우지윤(如時雨之潤) 여인에게 빠져듦이 마치 때 맞춰 내리는 단비처 럼 메마른 대지(大地)를 적심 같도다.

이 노변(路邊)의 삼문(三問)이야 말로 요임금이 한 민정시찰(民政視察)의 가장 큰 성과(成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왕은 예법(禮法)에 따라 청혼(請婚)을 하고 혼서(婚書)를 보냈다. 만 백성(百姓)이 우러러 경축(慶祝)하는 결혼날에 왕비(王妃)의 가마가 왕궁에 도달(到達)하던 날, 수많은 신하(臣下)들과 궁녀(宮女)들이 흥분(興奮)하며 왕비(王妃)가 얼마나 대단한 미인(美人)일까 궁금증이 불타올랐다. 그런데 막상 가마 문이 열리자 왕비(王妃)를 처음 본 궁녀(宮女)들의 입가에 조소(廟笑)의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 조소의 미소(微笑)가 파문(波紋)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가마에서 내린 왕비(王妃)는 무수한 시종(侍從)들 앞에서 팔을 둥둥 걷어 올리고 주방(廚房)으로 걸어 들어갔다. 궁녀(宮女)들이 더욱 비웃으며 말렸다.

왕비(王妃)는
"난 왕의 아내(妻)다. 내 손으로 진지를 해드리는 게 도리(道理)이다. 저리 비켜라."
그렇게 왕의 수라상(水刺床)을 준비한 다음에 사치스러운 궁녀들의 복장(服裝)과 경박(輕薄)한 행동을 지적하여 호령(號令)했다.

"오늘부턴 백성(百姓)들보다 사치(修)하는 자는 그냥 두지 않겠다. 농어촌(農漁村)의 선량(善良)한 부인들보다 잘 먹거나 더 게으른 자는 용서(容恕)하지 않겠다. 백성들의 어버이이신 왕을 섬기는 자들이 백성들보다 예(禮)와 도리(道理)가 모자라면 어떻게 왕께서 바른 정치(政治)를 하실 수 있단 말이냐?"
왕비의 엄숙(嚴肅)하고 단호한 질책(比責)을 받은 궁녀들의 비웃던 입이 모조리 놀란 조개처럼 굳게 다물어졌다.

그날부터 나라의 질서(秩序)와 도덕(道德)이 하 루가 다르게 바로 서고 꽃피기 시작했다. 당장 궁중(宮中)이 달라지고 대신(大臣)들이 달라졌다. 공직자(公職者)가 달라지니 백성이 금새 달라져 나라엔 도둑이 없어지고 세상인심(世上 人心)이 어딜 가나 풍요(豊饒)로워 졌다. 그리하여 이 위대한 여인이 요순시대(堯舜時代)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창조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기적(奇績)을 낳았다. 왕(王)으로부터 촌부(村夫)까지 백성은 하나같이 바른 사고(思考)와 예의(禮儀)를 지켜 온 천지가 높은 수준(水準)의 도덕사회(道德社會)를 이루었다.

먼 훗날 왕비(王妃)가 돌아가시자 온 나라의 백성들과 왕은 크게 목놓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호호백발(皓皓白髮)의 노인들까지 높은 신하에서부터 저 눈먼 땅의 무지한 사람까지 모든 백성(百姓)이 땅을 치며 울었다는 것이다. 왕비의 은덕(恩德)을 높이 기리고 사모(思慕)하는 백성들 중엔 그 서거소식에 너무 충격(衝擊)을 받아 쓰러지거나 식음(食飮)을 전폐(全閉)하고 애도(哀悼)하는 자가 부지기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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