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일) 09:00 동기회 자전거동호회 5명 인천역에 모여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 진격로 따라.

6.25가 발발했던 1950년 9월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련던 전장상황이 단번에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었지만 그래서 맥아더장군은 이곳을 상륙작전 지역으로 결심했다. 적이 기대하지 않은 곳을 선택한 것이다. 심리적 기습이고 작전적, 전략적 기습이다.한국군 해병대도 작전에 동참했다.

9월15일 새벽에 월미도 그린비치, 레드비치로 상륙이 시작되었다. 북괴군 중공군의 주력은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어 이 지역 방어는 아마 후방지역 담당부대가 지키고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들의 방어력은 무척 강했다. 선두 상륙부대가 새벽에 월미도에 상륙하여 하루를 버텨준 덕분에 그 다음 만조시간에 맞춰 주력부대가 상륙할 수 있었다 한다.
 
9월 15일 상륙작전으로부터 9월 27일 한미 해병대가 서울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올리고 적 치하에 점령되었던 서울을 수복하기까지 13일이 걸렸다. 서울로 향하는 작은 고지 하나하나를 점령해 가면서 진격을 거듭하여 김포공항을 탈취하고 개화산과 우장산을 점령했다.  한강 건너로 서울이 빤히 보이는데 도강은 그리 쉽지 않았다. 한강까지는 5~6일만에 진격해왔는데 한강에 이르러 수차례의 도강과 철수를 반복하며 강을 건넌 후 5일여만에 광화문에 이르렀다.
 
한강을 건너 광화문에 이르는 중간 중간에 이름없는 작은 구릉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그 하나하나의 언덕같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생사를 걸었던 한미 해병대장병들의 고비들이 느껴진다. 지금은 너무나 평온한 그 진격로 부근의 서울 시가지와 주말을 맞아 아이들 데리고 공원에서 즐기고 있는 저 아름다운 곳에 어디 그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며 누가 고마운 마음을 내기라도 하겠는가? 오늘의 자유평화 대한민국을 이루는데 얼마나 많은 세계 여러나라 젊은이들이 피땀을 흘렸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
 
맥아더장군이 한국군에 참전한 나이가 70세로 아마 우리 나이였던 듯 싶다. 우리네는 전역한지 15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노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다. 우리들이라도 그 여러 선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당시의 전장상황을 느껴보자고 5명의 정예 자전거 대원들이 나선 것이다.

인천역을 출발하여 월미도과 맥아더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을 거쳐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빤히 보이는 서울을 향해 계속 진격해갔다. 도심지를 지나고 뚝방길, 공원길, 가파른 비탈길로 고지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행주산성 수색 서강대 아현동고개 독립문 경운궁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드디어 오후 5시 45분, 8시간 반 만에 광화문에 이르러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렸다. 72km를 달려왔다.   
 
누가 봐주는 이 없고 관심가져주는 이 없을지라도 우리 스스로 소임을 다하면서 자유대한민국이 그때의 피땀 흘려준 덕분으로 오늘을 맞고 있다. 국민이 행복하고 세계와 인류에 그 고마움을 갚아나가는 위대한 한민족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염원해 본다.

당시의 전장은 이랬었나 보다

 
09:00 인천역에 모여 이동시작

월미도공원 전망대

태극기와 성조기를 펄럭이며 달렸다

부평구청역 부근에서 점심식사.
모이고 보니 고교 같은반 친구가 3명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코스모스 꽃은 피었겠지

김포공항에서 3분마다 1대씩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다

행주대교를 통해 한강을 쉽게 건넌다

행주산성 앞의 해병대 도강기념비 참배

아현동 부근인가 이리 절벽같은 급경사길을 오른다

독립문을 지나 경희궁을 거쳐 드디어 중앙청앞 광화문에 도착.
무심히 지나는 수많은 저 청춘들은 우리에게 관심의 눈길조차 없지만 하늘은 우리의 정성을 알지 않겠나 위안을 삼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