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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기제사 가족모임에서
여태까지도 부모님상을 당하는 친구들도 있어 그 친구들은 참 부모님복이 많구나 생각되기도 하지만 29년 전 돌아가실 때에 이미 부친은 85세이셨다. 조선말인 1906년에 태어나셔서 일제시대와 6.25전쟁, 이후의 재건과 새마을사업 시대를 거쳐 근대화, 현대화가 이루어진 숨가쁜 변화들을 다 겪으셨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사회까지 사셨던 아버지
6.25전쟁시에는 피난을 다니면서 치열했던 낙동강전투의 전쟁통에도 가족들을 안전하게 챙기셨다. 4.19와 5.16을 거쳐 재건운동과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길을 넓혀 지게대신 리어카가 다닐 수 있게 했고 빨갛게 벗겨진 산에 대대적 사방사업을 하여 산림녹화를 했다. 수백, 수천년의 초가지붕이 스레트지붕으로 바뀌어 짚으로 이엉을 엮을 일이 없어졌다. 통일벼 품종이 보급된 덕분에 벼 수확량이 늘었고 치산치수가 개선되면서 가뭄 홍수로 인한 흉년도 점차 줄어들었다. 자급자족도 빠듯했던 농사였지만 자식들은 다 학교로 보내 남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게 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서울로 고교유학을 했고 육사로 진출하는 기회가 되었다.
일본으로 가서 활동하신 장남을 대신하여 둘째인 아버지가 14살때부터 집안 살림을 맡아 부모님을 모시고 조상모시는 일을 다 하셨다. 비밀리에 독립활동을 하신 할아버지를 뒷받침하느라 어려움도 많이 겪고 결국은 할아버지가 일경에 체포되어 진주교도소에 수감되는 지경을 당했다. 수감생활 중에 등창이 나신 할아버지를 지게로 모시고 집에 왔고 그 후유증으로 할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집안의 족보를 다 챙기고 대소사에 중심적 역할을 하셨으며 마을에서도 소통과 화합에 앞장서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고 마을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우리 집에는 거의 다 갖추고 있기도 했다. 마을의 공동우물이 동구밖 도라새미밖에 없었는데 우리집 마당에 우물을 파서 동네사람들이 멀리 가지 않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이고 지고 갈 수 있게 했다. 시골마을은 그렇게 큰 변화없이 오랜동안 평온함을 유지해오다가 근대화과정에서 이전의 생활방식이 다 뒤집어지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고 1960년대 말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문화생활이 더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군생활로 여기저기 자주 옮겨다니느라 부모님 모실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대구에서 군사령부 비서실장 근무하는 동안에 우리 관사에 모시고 살았다. 초등학생인 손자들 손잡고 상점에서 과자도 사주면서 군사령부의 복노인으로 그렇게 살았다. 약주를 워낙 좋아 하셔서 집에 술이 끊이지 않았는데 내가 술을 못마시니 혼자서 드셨다. 1990년 9월에 연대장(야공단장)으로 부임하는데 이취임식 단상에 모시고 싶었는데 한달여를 앞두고 8월에 별세하셨다. 부모님 일을 생각하면 누구나 아쉬움이 크다. 이제는 좀 잘 모실 형편이 풀려간다 싶을 즈음이 되면 부모님이 이미 안계시는 그런 아쉬움이다.
가정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 국가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더라도 그 시발점이 된다. 자손이 번창하면 나라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요 공부를 잘하고 바른 사람이 되면 곧 국가의 인재요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가정의 화목은 지나침이 없다. 자녀들은 부모가 하는걸 그대로 배우고 따라가게 되니 어른들이 먼저 바르게 살아나갈 일이다.
維
歲次 己亥 7月 庚午朔 초하루 庚午 孝子 ㅇㅇ과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이 아버님의 기일에 함께 모였습니다.
아버님 별세하신지 29년의 한세대가 흘러 그 당시에 없던 손주들이 어느새 성장하여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공자께서 부모생존 형제자매 화목이 행복한 모습이라 하셨고 부모님께서도 늘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라 하셨는데 이제 부모님은 계시지 않아도 저희 형제자매와 손주세대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이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부귀영화는 억겁의 세월을 두고 덕을 쌓아온 결과로 하늘이 내리는 일이지만 사람들의 욕심은 그것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여 만족보다는 언제나 부작용과 낭패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화목은 추구할수록 빛이나고 웃음과 행복이 뒤따르는 길인 것을 부모님께서는 일찍이 터득하시고 저희에게 그렇게 하신 줄로 압니다. 부모님 안계신 자리에 누님과 자형께서 그 역할을 해오셨고 형님이 든든한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이후 한해 사이에도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자형 누님의 건강이 좋아져 형제간 모임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누님은 무릎수술로 심했던 통증들이 줄어들고 이제는 잘 걷게 되었습니다. 5남매와 가족들 모두 그 나이만큼은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손주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까지 진출하여 글로벌시대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싱가폴, 태국, 일본 등지에서 공부하거나 취업하여 큰 꿈을 키워가고 있고 올해 대학을 준비하는 손주도 있습니다. 올해에 증손이 또 늘어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세상사 매사에 어디 순조로운 일만 있겠습니까 마는 가끔씩 부닥쳐오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도 모두 감당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슬기롭게 잘 이겨나가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 기일을 맞아 이 자리에 참석했거나 사정상 함께하지 못한 자녀 손주들까지 잊지 말고 챙기시어 큰 사랑을 베푸소서.
조촐하지만 정갈한 음식을 정성으로 올리오니 흠향하시오소서.
기해년 陰 7월 1일, 자녀 일동이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 올립니다.
여태까지도 부모님상을 당하는 친구들도 있어 그 친구들은 참 부모님복이 많구나 생각되기도 하지만 29년 전 돌아가실 때에 이미 부친은 85세이셨다. 조선말인 1906년에 태어나셔서 일제시대와 6.25전쟁, 이후의 재건과 새마을사업 시대를 거쳐 근대화, 현대화가 이루어진 숨가쁜 변화들을 다 겪으셨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사회까지 사셨던 아버지
6.25전쟁시에는 피난을 다니면서 치열했던 낙동강전투의 전쟁통에도 가족들을 안전하게 챙기셨다. 4.19와 5.16을 거쳐 재건운동과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길을 넓혀 지게대신 리어카가 다닐 수 있게 했고 빨갛게 벗겨진 산에 대대적 사방사업을 하여 산림녹화를 했다. 수백, 수천년의 초가지붕이 스레트지붕으로 바뀌어 짚으로 이엉을 엮을 일이 없어졌다. 통일벼 품종이 보급된 덕분에 벼 수확량이 늘었고 치산치수가 개선되면서 가뭄 홍수로 인한 흉년도 점차 줄어들었다. 자급자족도 빠듯했던 농사였지만 자식들은 다 학교로 보내 남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게 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서울로 고교유학을 했고 육사로 진출하는 기회가 되었다.
일본으로 가서 활동하신 장남을 대신하여 둘째인 아버지가 14살때부터 집안 살림을 맡아 부모님을 모시고 조상모시는 일을 다 하셨다. 비밀리에 독립활동을 하신 할아버지를 뒷받침하느라 어려움도 많이 겪고 결국은 할아버지가 일경에 체포되어 진주교도소에 수감되는 지경을 당했다. 수감생활 중에 등창이 나신 할아버지를 지게로 모시고 집에 왔고 그 후유증으로 할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집안의 족보를 다 챙기고 대소사에 중심적 역할을 하셨으며 마을에서도 소통과 화합에 앞장서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고 마을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우리 집에는 거의 다 갖추고 있기도 했다. 마을의 공동우물이 동구밖 도라새미밖에 없었는데 우리집 마당에 우물을 파서 동네사람들이 멀리 가지 않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이고 지고 갈 수 있게 했다. 시골마을은 그렇게 큰 변화없이 오랜동안 평온함을 유지해오다가 근대화과정에서 이전의 생활방식이 다 뒤집어지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고 1960년대 말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문화생활이 더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군생활로 여기저기 자주 옮겨다니느라 부모님 모실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대구에서 군사령부 비서실장 근무하는 동안에 우리 관사에 모시고 살았다. 초등학생인 손자들 손잡고 상점에서 과자도 사주면서 군사령부의 복노인으로 그렇게 살았다. 약주를 워낙 좋아 하셔서 집에 술이 끊이지 않았는데 내가 술을 못마시니 혼자서 드셨다. 1990년 9월에 연대장(야공단장)으로 부임하는데 이취임식 단상에 모시고 싶었는데 한달여를 앞두고 8월에 별세하셨다. 부모님 일을 생각하면 누구나 아쉬움이 크다. 이제는 좀 잘 모실 형편이 풀려간다 싶을 즈음이 되면 부모님이 이미 안계시는 그런 아쉬움이다.
가정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 국가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더라도 그 시발점이 된다. 자손이 번창하면 나라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요 공부를 잘하고 바른 사람이 되면 곧 국가의 인재요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가정의 화목은 지나침이 없다. 자녀들은 부모가 하는걸 그대로 배우고 따라가게 되니 어른들이 먼저 바르게 살아나갈 일이다.
維
歲次 己亥 7月 庚午朔 초하루 庚午 孝子 ㅇㅇ과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이 아버님의 기일에 함께 모였습니다.
아버님 별세하신지 29년의 한세대가 흘러 그 당시에 없던 손주들이 어느새 성장하여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공자께서 부모생존 형제자매 화목이 행복한 모습이라 하셨고 부모님께서도 늘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라 하셨는데 이제 부모님은 계시지 않아도 저희 형제자매와 손주세대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이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부귀영화는 억겁의 세월을 두고 덕을 쌓아온 결과로 하늘이 내리는 일이지만 사람들의 욕심은 그것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여 만족보다는 언제나 부작용과 낭패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화목은 추구할수록 빛이나고 웃음과 행복이 뒤따르는 길인 것을 부모님께서는 일찍이 터득하시고 저희에게 그렇게 하신 줄로 압니다. 부모님 안계신 자리에 누님과 자형께서 그 역할을 해오셨고 형님이 든든한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이후 한해 사이에도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자형 누님의 건강이 좋아져 형제간 모임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누님은 무릎수술로 심했던 통증들이 줄어들고 이제는 잘 걷게 되었습니다. 5남매와 가족들 모두 그 나이만큼은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손주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까지 진출하여 글로벌시대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싱가폴, 태국, 일본 등지에서 공부하거나 취업하여 큰 꿈을 키워가고 있고 올해 대학을 준비하는 손주도 있습니다. 올해에 증손이 또 늘어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세상사 매사에 어디 순조로운 일만 있겠습니까 마는 가끔씩 부닥쳐오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도 모두 감당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슬기롭게 잘 이겨나가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오늘 기일을 맞아 이 자리에 참석했거나 사정상 함께하지 못한 자녀 손주들까지 잊지 말고 챙기시어 큰 사랑을 베푸소서.
조촐하지만 정갈한 음식을 정성으로 올리오니 흠향하시오소서.
기해년 陰 7월 1일, 자녀 일동이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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