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수) 오후, 육사총동창회 주관으로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로 연탄나눔 봉사에 6년째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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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1장에 1원

'65년 신당동 달동네(유락동, 도선동) 판잣집과 부럭스레트집에서 자취하던 고교시절에 電車값이 1원50전 정도였다 하니 그 보다는 연탄값이 조금 쌌던 것같다. 지금 버스비 1,300여원에 비해 연탄 1장에 800원이면 물가수준이 그 정도였나 보다.

물 한지게에 1원50전

여름날 일요일에는 아이스께끼통 메고 골목골목 외치고 다니며 팔아 하루에 20원을 벌었다. 연탄값, 공동수도 물값정도는 번 셈이다. 비탈동네 공동수도에서 물지개로 2통 1원50전에 물을 지고와서 독에 붓고 그 물로 밥해먹고 작은 세숫대야에 한바가지 물로 세수하고 그 물에 빨래하고 또 걸레빨아 청소까지 하고는 그 물을 나무밑에 뿌려 주었다. 버리는 물이 한방울도 없었던 듯싶다.

학교 근방에 연탄공장이 있어 거기서 달동네로 연탄 한두장씩 사서 들고 왔다. 새끼줄 한쪽을 매듭으로 묶고 구공탄 가운데 구멍에 꿰어 한장이나 두장 들고 왔다. 여인네들은 빨래판에 서너장씩 이고 왔고 지게가 있으면 열장 정도씩 져다 날랐다. 부엌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는 집이었는데 겨울에 부엌공간이나 처마밑에 연탄이 수십장 쌓여 있으면 마음이 무척 푸근했다. 연탄까스 사고도 무척 많았었는데 다 이겨낸게 신기하기도 하다.

연탄이 산림녹화의 원동력

우리 고향동네는 연탄덕분에 산림녹화가 되었다고 하겠다. 산에서 나무를 잘라다가 불을땠으니 온 산이 다 발갛게 벌거숭이 산이었다. 60년대초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을 스레이트로 바뀌고 아궁이가 연탄아궁이로 바뀌니 산에서 나무를 잘라올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와함께 사방사업으로 산림녹화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 전방지역 대대장 근무시에도 관사는 연탄난방이어서 큰방, 작은방, 거실, 부엌, 화장실 등 4군데 아궁이에 한군데마다 하루 두세번씩 아내가 연탄을 갈아주어야 했다. 밤에 시간을 잘못 맞춰 불이 꺼지면 다음날 불붙이는데 애를 먹었다.

세월이 멈춰선 백사마을

여기 중계동 백사마을은 세월이 60년대로 멈춰있는 듯한 동네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고 있고 가끔씩 가보는 지역은 예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인데 여기는 우리가 처음 갔던 6년전보다 나아진게 전혀 없어 보인다.오히려 갈수록 집들이 낡아 지붕에 비닐이나 멤브레인이 더 덮혀있고 담장도 더 허술해 보인다. 건축허가는 물론 개보수 허가가 나지 않으니 현재상태로 유지할 수밖에 없나 보다. 바로 옆블록까지는 새 아파트들이 들어섰는데 600여세대 900여명이 산다는 여기는 어느 세월에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여기 이들이 이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다. 연탄 8,000장을 한집에 200장씩 쌓아주고 쌀과 방한복도 후원했다.

세상은 여러 꽃이 핀 야생화들판

후원행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발길이 무척 행복하고 가볍다. 무거운 연탄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여러차례 오르내리고 들고 옮기기도 하면서 중노동급 일을 추운 날씨에 했는데도 그분들과 그 일, 그리고 함께한 선후배 동창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셨구나 싶다. 어떤해에는 그분들의 불편한 삶이 계속 이어질 것을 생각하면서 돌아오는 마음이 무겁기도 했었다. 그런데 누구나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떤 처지에서나 그렇게 열심히 살면 될 일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하다 보니 마치 내 삶이 그네들보다 더 우월한듯 느껴질 수 있겠지만 행복도가 그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나 아름다운 꽃은 피어난다. 세상은 갖가지 꽃이 피어난 야생화 들판이다. 사람마다 피우는 꽃의 종류가 다를 뿐...

이런 동네다.

20기 선배님도, 총동창회장도 지게지고

릴레이 전달이 훨씬 빠르다. 수십명의 정성이 연탄마다 실린다.

참가한 동기생 8명

어둑해져서야 화랑회관에 와서 저녁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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