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수)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에

聖人께서 오신 날

한시도 편할 날 없이 온갖 근심걱정과 心身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길을 일러주신 인류의 聖人께서 탄생하신 축복의 날이 '부처님오신날'이다.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다른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당시 인도지역 일반인들의 사상 몇가지는:
1)유물론...
세상을 地水火風의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부정하고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과와 果報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果報도 없고 다음 生도 없는 모든 因緣果를 부정하고 있다.

2)숙명론...
사람의 빈부귀천, 선악부정 등 인간행위는 숙명적으로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숙명론은 받아들이기가 쉽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숙명적으로 정해져 몸을 받고 그 숙명대로 산다고 생각한다.

3)神의 뜻대로...
神이 이 세상을 주재하므로 인간은 神의 뜻에 따라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

싯달다태자의 출가와 수행

왕자로 태어나서 세상의 온갖 복락을 다 누리고 살 수 있었던 싯달타태자에게 근본적인 의문이 일어났다. 세상에서 누리는 어떤 행복도 시간이 지나면 변해감에 따라 영원할 수가 없으니 완전한 행복이 되지 않고 결국에는 늙고 병들고 죽는 때를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건강하다고 언제까지 건강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직 젊다고 언제까지 젊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직 살아있다고 언제까지 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병들고 고통을 받는다. 지금 나의 건강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또 누구나 늙고 쇠약해져서 고통을 받는다. 지금 나의 젊음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또 누구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 지금 나의 삶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범행을 닦지 않는다. 젊고 건강하다고 거들먹거리며 방일하고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늙고 병들어 죽는 근본적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싯달다태자는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출가하여 6년간 당시의 여러 구도수행과 극한의 고행까지도 다 겪었지만 어느 것도 완전한 길은 되지 못했다. 모든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고요히 하여 入定에 드시어 드디어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체득하셨다.

그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을까?

부처님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체득하신 후 한동안 선정에 들어 생각하셨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겠구나''

어렵게 체득하신 법을 중생들에게 설해야된다는 범천의 간절한 권청에 따라 전법을 결심하시고 녹야원에서 5비구 법문을 시작으로 하여 지금까지 2,560년이 넘게 인류를 완전한 행복과 자유로워지는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당시 인도지역 문화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엄격한 카스트신분제도로 정해져있는 사회였는데 부처님께서는 누구나 신분에 관계없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는 위대한 선언을 하셨고 실제로 여러 천민계급의 사람들이 부처님제자가 되어 큰 도인이 되셨다.

이전까지의 사상이었던 유물론이나 숙명론, 또는 신의 뜻에 순종하는 종속관계의 인간에서 탈피하여 누구나 수행을 통해 안목(카테고리)을 전환하기만 하면 지금의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부처님과 다름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자신을 삶을 스스로 개척하여 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는 福音을 전해주신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 발명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는데도 '안목'이 달라서 모르고 있었던 것을 보는 눈을 열어 주신 것이다. 쉽게 비유하면 손바닥이 있고 손등이 있는데 일반인의 안목으로는 손바닥쪽만 있는 줄 알고 평생 그 속에서 복닥거리고 살다가 떠나는데 손등을 돌려보라는 것이다. 둘이 아니지만 전혀 같지는 않지 않은가?

봄에 풀과 나무에 새잎이 돋아나고 무성했다가 가을에 낙엽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生滅世界'가 있고 그 나무가 수명이 다해 죽어도 끊임없이 또 풀과 나무가 생명으로 이어지게 하는 변함없는 '眞如世界'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 둘이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따로는 아니다. '피조물(작용)'은 계속 변화하지만 '창조주(본체)'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 두 세계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앞뒤로 함께 있다(一心二門). 앞뒤라 하지만 사실은 눈앞에 함께 펼쳐져 있는 것이다.

두번째의 안목 열기

첫번째의 안목에서는 生老病死가 계속 반복되고 어느 누구도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두번째의 안목에서는 生老病死 자체가 없다. 오로지 현재가 계속 이어져 가는 永遠이 있을 뿐이니 거기에 과거 현재 매래나 근심걱정, 전생의 業과 같은 어떤 것도 붙을 자리가 없다.

내 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내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촉감으로 느끼는 5感은 눈귀코입몸의 기관들이 하는가? 아니다. 그 기관을 통해서 하고 있는 주인이 있다. 일반적으로 생명력이라고도 할 것이고 마음이라고도 할 그 무엇이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만 그렇게 하고 있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다. 흰 것을 희다고, 검은 것은 검다고 보고 춥고 더운 줄 아는 '그놈'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있었고 이 몸뚱이가 떠난 이후에도 있다. 눈귀코입몸 등의 '신체를 나'로 삼으면 언제 태어나서 나이들면 늙고 병들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그 신체를 쓰고 있는 '주인공을 나'로 삼으면 몸은 이 세상에 소풍나왔다가 때가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 줄 알아 그 주인공인 '생명력,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이 이전처럼 '長今(영원한 현재)'이 되고 나는 세상의 生老病死를 비롯한 온갖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삶에서 일어나고 부닥치는 여러 문제들은 그 문제가 풀려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목이 달라져서 그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게 될 때 완전하게 해결된다. 그렇게 될 때 나는 저자거리에 살면서도 어디에도 걸림없는 바람같은 '大自由人'이 된다.

부처님오신날에 나 자신을 觀照해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바쁜 삶에 조금의 여유라도 생길터이니...

국방부원광사 보운 주지법사님은 법문을 통해
'부처님일대기 팔상성도'로 부처님법을 설하셨다.

도솔천에 계시다가 중생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려는 원을 세우고 중생세계에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태자로 지내시다가 출가, 수행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시어 중생을 위해 설하셨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시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하여 설명해 주셨다.

아들과 함께

점심공양은 옛 수경사법당인 충무로역 충정사에서

38년전 백마부대 대대장시절에 처음 불교에 입문한 인연이 된 고봉산영천사. 당시 초연스님이 아직도 계신다.

백마부대에서의 호국백마사가 지금은 영외법당으로 수년전에 신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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