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수) 11- 5일차, 디카로 촬영한 부처님 깨달음의 자리, 마하보디사원과 보리수
 
싯다르타께서 6년의 고행을 내려놓고 중도의 길로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완성하신 그 자리로 갔다. 성도를 하신 자리이다.

佛法만난 福, 사람으로 태어난 福

성도를 하심으로써 비로소 싯다르타께서 부처님이 되셨다. 그 깨달음으로 인해 지금까지 2600년 이어오도록 인류에게 고통을 여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로 살아가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래서 佛法 만난 것이 큰 福이고 이 법을 체득할 수 있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또한 큰 福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 깨달음의 현재화

이번 성지순례의 2가지 과제 중의 하나가 '부처님 깨달음의 현재화'라 하겠다. 상월결사로 시작된 첫번째의 과제는 당연히 한국불교의 중흥을 도모하는 것이지만 두번째의 과제는 성지순례에 동참하는 개개인이 부처님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런 체득이 되지 않는다면 성지순례가 역사문화답사 여행의 수준에 그치고 말 것이다. 부처님 발자취를 돌아보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당시 부처님의 숨결을 현지에서 직접 느끼고 그 깨달으신 바를 나의 현재로 끌어와 현재화시키야 살아있는 불교가 된다. 경전이나 책속의 글에 들어있던 내용들이 생명으로 살아나 目前에서 펄떡이게 하는 것이다.

佛法은 不立文字로 어떤 글 속에 있거나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찰라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이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나중에 손가락만 천당에 가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수단이 아니면 뜻을 전할 수가 없으니 방편으로 그리 할 수밖에 없지 싶다. 어느 누구라도 이 자리에서 발심이 되게 하고 나아가 적멸보궁으로 들어오게 하는 인연으로 이어지게 한다면 그 공덕이 또한 무량하지 않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심이 바탕이 되어 곧바로 깨닫는 이들이 수도없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역대조사 선지식을 거쳐 우리에게 오는 동안에 지식문명이 발달되고 사람들의 알음알이가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신심이 떨어지고 있는 것같다. 성지순례를 통해 그 신심을 회복하는 것만해도 큰 소득이라 하겠다. 대신심이 바탕이 되어 대의심, 대분심으로 나아가 몰록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으셨을까?

왜 부처님의 깨달음이 인류에 구원의 메세지가 되는가 하면:
만약 그런 깨달음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生滅門' 하나만 있는줄 알고 그렇게 한 生을 살다가 죽기를 반복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 생멸문에 卽하여 '眞如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category가 다른 두개의 문이 함께 열려 있다는 것이다.

'生滅'에서는 분별이 일어나고 생노병사가 있지만 '眞如'에서는 본래부터 있어 태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고 했다.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만이 fact이고 과거나 미래는 관념에 불과하다. 그러하니 번뇌가 없고 중생도 없다. 善惡이나 罪, 業까지도 붙을 자리가 없다. 그대신에 새로운 시간 공간이 계속 샘처럼 신선하게 솟아나고 있다. 日日新新이고 '본래청정'이다. 사홍서원이 일시에 다 이루어 진 상태가 진여의 모습이다. 見性한 이후에 成佛이 아니라 이미 성불임을 알고 그 마음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성불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조계종의 宗旨이다.

현상세계는 철저히 인연과보

생멸문에서 일어나는 원리는 한치도 틀림없는 '인연과보'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므로 현실 생활에서는 악을 행하지 말고 선하게 살아야 하며 열심히 복을 짓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생멸문으로는 절대로 완전한 자유로움과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가 없다. 그 해답의 길은 카테고리가 다르다. 진여문을 통하면 일시에 해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여러 복잡한 문제들은 그 문제를 풀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이 커져서 그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음으로써 해결된다고 했다. 본체의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작용들이 다 생명력이 살아 활동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의 다른 모습이라 하겠다. 세상은 다양한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야생화 들판이다.

부처님법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싶고 따라서 이 법을 만난 것이 큰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마하보디사원으로 줄서서 참배

마하보디사원으로 입장시에는 스마트폰이나 전자시계와 같은 전자제품은 가지고 갈 수 없어 차에 다 두고 가야 한다. 이전에 테러같은 사건이 있었던가 보다. 다행히 디카는 허가권을 1$에 구입하여 휴대할 수 있어 촬영이 가능했다.

마하보디사원 안으로 한줄로 길게 줄을 서서 차례로 참배하고 나와서 대탑 바깥 탑돌이를 세바퀴 한 후에 뒷편 보리수나무 아래 준비된 자리에서 법회를 봉행했다. 지금의 보리수나무는 부처님당시 그 보리수의 증손, 고손 정도 되는 소중한 나무이다. 어쨌거나 그 자리이다. 떨어진 보리수잎을 몇개 주워 깨달음의 증표로 책갈피에 끼워두었다. 時空이 그 속에 담겨 있다.

불단에 올릴 꽃접시를 들고 입장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린다.

보리수나무 아래에는 여러나라 스님들의 독경과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자리

원명 주지스님 법문

바깥으로 탑돌이

기념촬영

아소카석주

보드가야 마하보디사원의 보리수나무 잎을 코팅으로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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