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이고 덥지 않은 여름이 있었을까 마는 지나고 보면 그 여름이 그 여름이고 언제나 올 여름이 젤 더운 것같다. 1990년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다. 

여름감기 기운이라고 현대아산병원에 가벼운 마음으로 부친께서 가셨는데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이것 저것 검사하느라 수차례 혈액 체취하고 하다보니 금방 환자가 되어버렸다. 입원절차를 거쳐 곧바로 링거병과 각종 약을 연결한 줄을 여러개 달고나니 또 중환자가 되어버렸다. 병원에 가면 아픈 사람이 나아서 나오게 될거라고 기대했는데 걸어서 들어간 분을 침대에 눕혀 결국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게 병원인가 싶어 원망스러웠다.

대구에 근무하고 있어서 며칠 후 주말에 갔더니 이제 말씀도 못하시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우리 형제간끼리만 이야기 나누고 침대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멀뚱히 바라보며 알아들으시거나 않거나 우리 말만 일방적으로 전해드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한두달 정도 여름을 그렇게 아무런 차도가 없이 지내시는 동안 5남매가 여러  의논을 했다. 지금도 그렇다고 하는데 그때도 산소호흡기 사용문제였던것 같다. 倫理와 理想, 그리고 現實 사이에서 보호자가 결심해야 하는 고민이다. 그런 여러 쉽지 않은 눈물과 눈물의 많은 心的 갈등과정을 거치면서 그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8월 20일에 85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한달후면 내가 원주지역 공병단장으로 부임하는데 취임식 단상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자랑스럽게 앉아계실 장면을 상상했더니 딱 한달이 모자라게 아쉬움을 남기신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부모님 일이야 충분하다고 할 수가 어디 있겠는가? 언제나 그 여러 고생하심에 보답해 드리지 못해 송구하고 모자람만 가득한게 부모님 일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아쉬움은 더 크다. 최근까지도 모친이 90세 넘게 살아계신 친구들을 보면서 더욱 그렇다. 물론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어떤 친구는 치매의 어머니를 모시느라 아들 며느리의 고생이 많은 경우가 있기는 해도 부모님 일은 한번 떠나면 다시 기회가 돌아오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계시는 것과 안계시는 건 천지차이라 할 것이다. 1983년, 그해 9월에 백마부대로 대대장 부임이 정해져 있었던 그 1월에, 지금으로 보면 너무나 젊으신 66세에 고향 집에서 별세하셨다.
 
지나고 보면 연세가 60이었거나 80, 또는 100세를 넘긴다 한들 크게 다를바가 없기는 하다. 어느 정도가 긴 것이고 짧은거라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는 동안에 어떻게 지내시고 자녀 손주들에게 어떤 교훈으로 남아있는가 하는 것만 이어져 가게 되니까 말이다.

부친이 별세하셨던 1990년 여름인 8월 20일에 방배동 큰집에 빈소를 차리고 골목에 천막을 설치하여 조문객을 접대했으니 찾아오는 분들도 애를 먹었고 접대도 격식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3일장으로 8월22일 아침일찍 천리 먼길 고향으로 나섰다. 마을 앞에 꽃상여를 준비하게 하여 살던 집을 돌아 마을앞에서 노제를 모셨다. 5남매 자식을 키워주고 한평생을 보낸 그 고향마을에 감사하고 작별을 고하는 의식이다. 1km정도 떨어진 장지로 선소리꾼의 구성진 선창과 상여꾼의 장단, 딸랑거리는 요령소리를 앞세우고 산으로 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노랑나비가 따라왔다. 그 이후에도 부모님 산소에 갈때마다 노랑나비가 우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동행했다.

누님 자형께서 1960년대 초에 용감하게 서울로 먼저 진출하신 덕분에 내가 '64년에 고등학교를 서울로 오게 되었고 그로부터 동생 형님 등 5남매가 모두 서울로 오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자형이 이제 80대 중반이시니 한갑자 세월이 흘렀고 세상도 사람도 다 변했다. 그래도 아직은 5남매 형제간과 손주들까지 명절과 부모님 기일에 함께하고 있으니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라.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라.
세상과 우주만물에 감사하라.

감사함 가운데 조상과 하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그 감사함을 젊은 자녀 조카들이 느낄 수 있게 한글 축문으로 작성하여 고해 올렸다.

제사날짜도 전통적으로는 돌아가신 전날 밤 11시 이후에 모시던 것을 다음날의 근무 출근을 고려하여 시대에 맞게 조정했다. 성균관의 유권해석을 참고하여 돌아가신 당일 저녁 8시에 모시고 10시경  복귀하는 것으로 하니 모두가 편안해 한다.

강신례와 참신례로 제사가 시작된다.
香을 피워 하늘에 있는 魂을 부르고
세잔(洗盞)으로 땅에 있는 백(魄)을 불러 혼백(魂魄)을 혼합하는 의식이다.

명절제사는 單盞에 讀祝이 없다 했고
기제사는 3잔, 독축이 전통이지만 아들 사위와 손주들까지 5번 잔을 올리고 명절에도 한글축문으로 손주들이 이해하게 하고 있다

강아지를 무서워 하던 손녀가 이제야 친해지고 있다.

<한글축문>


歲次 丁酉 7月 辛巳朔 初하루 辛巳 孝子 00와 자녀들, 그리고 손주들이 아버님의 기일에 함께 모였습니다.

아버님 별세하신지 어언 27년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있었던 자녀와 손주들보다 이후에 더 많은 손주들이 태어나 이제 새 가정을 이루고 사회 곳곳에서 여러 역할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하셨던 여러 지혜의 가르침들을 상기하면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고 있고 또 손주들은 국가의 인재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희들 곁에 계시지 않지만 마음속에 늘 부모님이 함께 하시고 조상님의 음덕이 우리들 삶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나타나고 있음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희들 또한 자손들과 후손을 위해 덕을 쌓아가는 일에 소홀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와 세상에 도움되는 여러 역할을 해 나가고 있음을 고합니다.
 
작년도 제사를 모신 이후 한해 사이에도 가족들의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님 자형 내외분은 당시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연세 정도로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매번 명절과 기제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해 오십니다. 우리 가정의 어른으로서 오래 건강하시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자손들과 손자 손녀, 외손자,외손녀들 모두 다복하게 살고 있으나 생활에 가끔은 어려움 처지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확신으로 모두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는 근본은 화목과 사랑입니다. 온 가족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서로 아끼고 도우면서 부모님께서 이어주신 전통을 잘 실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름 무더위가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잘 보살펴 키워주신 자녀들과 손주들이 오늘의 삶에 충실하면서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아름다운 삶을 펼쳐나가게 큰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오늘 기일을 맞아 이 자리에 참석했거나 사정상 함께하지 못한 자녀 손주들까지 잊지말고 챙기시어 크신 사랑을 베푸소서.
 
저희들에게 이어주신 정성과 사랑은 앞으로도 내리사랑으로 집안의 좋은 전통이 되게 해나갈 것입니다.
 
조촐하지만 정갈한 음식을 정성으로 올리오니 흠향하시오소서.
 
丁酉년 7월 초하루, 자녀 손주 일동이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 올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