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33년이전에 경기도 파주 어느 전방지역 방문했던 사진인가 보다.

이제는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가을에 진 단풍은 봄오면 다시 피어나지만 먼저 떠난 친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친구뿐만 아니라 본인이나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다리'아래에서(?') '拾得'하여 꽤나 오랜 세월 써먹은 육신이니까 잃는다고 해서 그리 손해될 일은 아니다. 고향에서 나와 고향 본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이며 낡은것 자리에 새것이 들어서면서 세상이 신선해지는 과정이기도 하여 아쉬워할 일도 아니지만 수십년 곁에 있었던 친구가 그 자리에 없으니 허전함이 없을 수 없다.

지난주말 고향 시제에 다녀왔다. 4~500년 선조들로부터 부모님세대까지 단소와 묘소에서 大문중엔 50여명이, 그리고 우리 小문중 시제에는 조카와 6촌 동생, 제수씨 등 5명이 함께했다. 축문으로 조상님 한분 한분 호명하며 讀祝을 했지만 어느 조상님이 몇대조이고 그분들이 몇세까지 살으셨는지 지금 후손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도 먼 후손들에게는 역시 여러 조상 중의 하나이고 어떤 벼슬을 했으며 행복하게 살았는지 큰 관심꺼리가 아닐게다.

같은 일요일에 고향시제에 갔던 나는 늦은밤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자기 문중 시제에 갔던 한 중학친구는 서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떠나갔단다. 넘어져서 병원에 갔는데 그 길로 월요일 낮에 아주 떠났다는 소식이 왔다. 화요일에 서울서 여러 친구들이 차로, 열차로 대구 빈소에 문상을 다녀왔다. 그 자리에서 우릴 반겨야할 그 친구가 영정사진 액자속에서 웃고 있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못알아 듣는다.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나 느껴진다.
''어이 친구들, 살아보니 인생 별것 아니야. 아옹다옹 할것 없어. 그냥 살아!''

그래 그렇게 떠나가고 말 것을 뭘 그리 주변과 왈가왈부하고 살았나. 연애시절, 신혼때와 어린 자녀들 데리고 친구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여행다녔던 수십년전의 사진속 우리는 모두 행복하지 않았나? 그 기분으로 계속 살 수는 없었나? 가족과 자녀에게 사랑스러운 말 하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면서 말일세.

'너무 가까우면 귀한줄 모른다'
살면서 갈등, 충돌과 불편한 마음이 어떤 경우에 가장 많이 일어날까? 그것에 매순간 매달려 다투고 화내고 미워하고 서운해했던 그 대부분의 일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특히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많이 일어난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인데 말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접촉할 기회가 많고 오래 접하고 살았으니 지나간 일들을 서로 많이 알고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편견이 생겨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야'하는 선입견으로 본다. 항상 가까이 있으니 소중한 줄 모르고 만만하게 대한다. 잔소리할 일이 많아지고 서로 잘 챙겨준다는 마음이면서 실제 언행은 그 반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일어난다. 남들이 모르는 그런 별도의 관계가 가까운 사람간에 형성되고 그런 습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어린이일수록 선입관이나 편견이 적다. 경험한 것이 적은 편이 오히려 더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다. 웃을 일이 훨씬 많다. 세상의 상황여건은 똑 같은데 달리 받아들인다. '처녀들은 말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는다'는 말을 어릴적부터 들었다. 아이들 표정과 어른의 표정을 비교해보면 완전히 다르다. 근엄한 표정이 아닌 천진난만한 표정이면 어떨까? '임운등등(任運騰騰)' 표주박이 냇물에 떠내려가는 그런 모습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 주장으로 우긴다. 쉽사리 양보하지 않아 서로 큰소리가 오고 간다. 지나고 보면 꼭 그게 맞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때는 물러서지 않는다. 한미연합사 근무시 전술토의나 전시연습, 강평 등 회의에 참석해보면 어떤 발표자가 설령 전혀 엉뚱한 내용을 언급한다고 해도 '그게 아니고...'식으로 반론하지 않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또 그럴 수도 있다는 인식으로 어떤 의견도 제시할 기회가 주어지는 토론문화이다. 언쟁이 생기지 않고 참 편안한 분위기에서 회의가 진행된다. 어릴적부터 자기 의견을 발표하고 상대방 의견을 들어주며 상호 배려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우리네 삶에서도 가정이나 직장, 선후배, 동료들 간에도 극단적인 주장만 오고 가면서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의 안목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리 긴 세월이 내 사는 동안 주어지는게 아니다. 칭찬하고 살아도 오히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終身行善이라도 善猶不足이요,
一日行惡이라도 惡自裕餘니라' 했다.
본체로 보면 원래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날카로운 칼날같은 blade의 '여기-이순간'에 무엇이라도 붙을 여지가 없이 그 자리는 '본래청정'이지만 개별적 작용을 하는 한 인간의 사명은 본체의 청정이 계속 유지되게 자기자신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며 칭찬할 일을 찾아보자. 언젠가 떠나는 날이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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