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들어 호국영령과 애국지사들을 모신 국립현충원을 예비역단체들과 함께 오전에 참배하고
오후에는 조선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를 참배했다. 정전에 49위, 영녕전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한다.

종묘광장공원의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앞

서울에서 50년 넘게 수없이 종로거리를 스쳐 다녔으면서도 정작 종로3가 도로가에 위치하고 있는 종묘광장공원과 종묘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나뿐만 이니라 함께 간 10여명 일행 모두가 그랬다. 관광으로 화려한 구경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왁자지껄 떠들며 다닐 수도 없이 정숙해야 하는 지역이니 의미를 찾아 일부러 가지 않으면 가볼 기회가 별로 안된다. 조선조 500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왕족 후손들이 때맞추어 제사를 지내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당시의 유교적 전통예법에 따라 종묘제례가 전통음악 연주와 함께 펼쳐지는 모습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현장에 온 느낌이 될것 같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중국에는 오히려 이런 전통 유교적 방식의 제사가 사라졌는데 여기는 유지되고 있으니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종묘'와 '사직'은 역사적 성지이다. 조선조 개국시 도읍의 궁궐 건설에 앞서 동쪽인 왼쪽에 종묘, 서쪽인 오른쪽에 사직단을 먼저 갖추는 것이 순서였고 난리기 나서 피난시는 신주를 먼저 챙길 정도로 소중하게 관리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에 가보면 피난시에 신주를 옮겨가서 모시는 종묘가 소규모로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전국 여러 곳에 있지만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신 종묘는 무척 소중히 여기는 성지이다. 그리스나 이집트 고대국가에서는 신전을 지어 조상을 모셨던 것 같다. 20대 초반에 이집트의 파라오를 이어받은 람세스2세는 전쟁 출정 전에 신전에 가서 기도를 하며 선대왕들과의 영적 대화로 정사를 결정했다 하고 중국의 황제들도 우리 동이족의 조상이면서 전쟁의 신이라고 일컫는 치우천황 사당에 전쟁 출정 전, 참배했다고 전해져 온다.  

오늘의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옛 조상님들의 후손으로 살아가지만 그 관습과 생각의 방식은 전혀 다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외형적으로 바쁜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나 되돌아 보며 조상님들께 송구스런 마음이 든다. 초등학생 단체팀과 함께 전문 문화해설사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며 1시간 정도 답사하는 동안 그 조상님들의 정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기회가 된다.

왕과 왕비 49위의 신주를 모신 정전

조선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교방식의 문화로 한양도성과 사대문, 궁궐 등이 조성되고 제사 및 제반 의식절차가 정례화되었다. 고려 공양왕 2년, 포은 정몽주의 발의에 의해 만들어진 제례규정에 제사의 방식이 제시되어 있고 종묘에도 그런 방식이 적용된 것 같다. 高祖까지 4대는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데 5대가 된 신주는 태우거나 묘소 옆에 묻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불경스럽다 하여 대신 별도로 옆에 영녕전을 건립하여 거기에 신주를 계속 봉안해 왔다. 재임중 업적이 뛰어난 몇분 왕의 신주는 옮기지 않고 정전에 그대로 모시기도 했다 한다.

34위의 신주를 모신 영녕전

왕궁에 가면 3대문이 있고 중앙 길과 양쪽에 조금 낮은 길이 조성되어 중앙을 어도라 했는데 종묘에 조성된 대문과 길은 같은 방식이지만 중앙의 길은 神이 다니는 길로 왕도 옆길을 이용했다. 길 바닥과 마당에는 넙적한 돌들이 그리 평평하지 않게 깔려 있는데 이는 여기를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조심해서 걷고 행동하라는 뜻이 있어 보인다.

길에 깔린 돌들이 울퉁불퉁하다

그 정신에서 독일 벤츠 승용차의 의자 구조가 떠오른다. 의자를 인체구조조에 맞게 얼마든지 안락하게 만들 기술은 있지만 앉으면 조금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장거리 운전시 오히려 몸의 피곤함을 덜어준다고 그 차를 타는 한 후배가 말한다. 기공수련시의 과정을 되새겨 보면 그게 맞는 것 같다. 어찌 공학에 그런 기공의 원리까지 적용했을까 독일인의 심오함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사람이 어떤 편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그 편안함조차 또 불편해져 좀 더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편안함이 불편함으로 진행되고 몸과 마음이 나태해 진다. 반대로 조금 불편한 상태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세에 불편함이 덜 느껴지면 또 조금 더 불편한 쪽으로 변화되어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되어 그리 불편하지 않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몸과 마음은 기운이 들어오고 생기가 솟아난다. 책상 의자에 앉아서 근무하기보다 서서 근무하는 책상에서 업무능력이 더 좋아진다는 사례들도 있다. 정신적 고수들의 수준은 동서양이 따로 없나 보다.

추운 날 오후 4시 20분부터 날이 어둑해진 때까지 1시간여 동안 다른 어디에서보다 진지하게 조선조 왕과 왕비, 그리고 당시 조상들의 생각과 영적인 경지를 짐작해본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靈은 하늘로 올라가고 魄은 땅으로 가며 육신이 머무는 곳으로 단단한 밤나무로 신주를 만들었다. 다시 영혼을 부를 때는 향을 피워 하늘에서 영이 오는 강신례를 하고 세잔을 하여 땅에 붓는 참신례로 땅으로부터 魄을 부르는 절차를 거치게 되나 보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만큼 되고 또 그 만큼 산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生老病死'의 과정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시대와 문화의 수준에 따라 다를 뿐이다. 과학의 수준이 첨단으로 발전되었다고 하는 현시대에 오히려 무형적인 분야에서는 옛선조들보다 뒤진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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