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엔 이화장, 이번주에는 경교장 답사를 다녀왔다. 이승만박사가 기거하셨던 종로구 낙산 아래의 이화장, 그리고 김구선생이 계셨던 서대문역 부근 강북삼성병원에 위치한 경교장이다.

이화장에서

경교장

소박한 국무회의실에서

이전에도 수차례 답사했지만 요즈음 시국과 관련하여 지난 역사의 재조명을 해보는 기회가 된다. 좌익이 주도하고 있었던 해방정국 분위기에서 어떻게 자유민주 대한민국이 탄생될 수 있었을까?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탄생되고 이승만박사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다. 이후 이승만박사는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 D.C에 집정관총재부를 설치하여 'Republic of Korea'를 영문 국가명칭으로 사용했다.

김구선생은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광복군을 훈련시키고 조직화하여 대일 선전포고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선전포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소련은 8월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북한지역으로 쳐들어왔고 1주일만에 승전국이 되었다.

미 육군은 멀리 천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한반도로 이동이 쉽지 않았고 소련의 계속적인 남하를 멈추게 하기 위해 38도선 이남으로 더 진출하지 않게 제안했는데 다행히도 소련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일본 패망 직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조선에서의 치안을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여운형에게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 여운형은 중국공산당, 소련공산당에도 가입했고 건국동맹을 해방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로 하여 남조선에 145개소의 치안대지부를 설립하고 8월말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발족시키면서 전국 읍 면 동 단위에 인민위원회를 두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자신은 부주석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그 시행이 좌절된다.
 
이승만은 4대강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 결정을 반대하면서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하도록 촉구하여 남북한 자유선거와 UN한국위원단의 파견을 결의하게 한다.

그러나 소련이 점령해 있는 38선 북쪽은 이미 김일성을 내세워 1946년 2월8일 공산당 정권을 만들고 군대까지 갖추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계획하고 있던 터라 UN위원단의 북측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다.

김구는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는 국가의 출범을 위해 북측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나 4.30성명에 서명하고 돌아와 남한의 단독 자유선거를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이때 이미 남한지역은 좌파가 주도하는 분위기였고 군부대까지도 좌파가 성행했다. 자유민주주의 탄생 여건이 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각계에서 활동하던 간첩과 공산주의자들 수십만명을 척결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이승만은 남북한통합선거를 위한 UN감시단장인 메논을 모윤숙 등으로 하여금 설득하게 하여 북측의 자유선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니 남한만이라도 자유선거를 시행토록 하는 유엔의 훈령을 다시 받아오게 하였고 그때 미국에서 활동하던 임영신의 활약에 힘입어 새로운 훈령을 받아왔다. 이어 5월 10일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7월17일에 제헌헌법을 공포하여 드디어 8월15일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정부가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로 UN이 1948년 12월12일 한반도 유일의 합법적 정부임을 승인하였다.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깊은 식견이 없이 조선시대의 봉건적 체제에서 양반의 수탈에 몸서리치던 일반 평민들은 어떻게든 과거의 체제를 기피했을 것이다. 또 신 학문을 공부한 지식인층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상적인 이론에 매료되었으며 소련의 재빠른 한반도 진입에 의한 조직강화의 결과로 좌익이 전국적으로 뿌리내리는 정국이었으니 가만히 있으면 좌우합작에 의한 건국이 되었을 것이고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이나 중국처럼 결국은 공산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요즘 좌파에서 북한의 주장을 따라 거론하는 고려연방제 방식의 좌우합작이 결국 공산화로 가는 길이 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해방 당시에는 우리가 세계정세에 어두워 그런 시국이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정보화시대에 북한의 실상이나 세계 여러나라의 상황을 잘 아는 상태에서 어찌 종북좌파 세력이 뿌리내릴 수 있는지 참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원인은 수십년간 북한이 공들여 온 대남전략 전술의 결과라 하겠다.
 
대한민국이 천우신조의 기회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게 됨으로써 백성들이 개인의 역량을 마음껏 발현하는 여건에서 행복추구를 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조상님들께 얼마나 감사해야할 일인가? 혹시나 이 시대에 우리의 불찰로 그 유지를 못하는 역사적인 죄인이 되지 않게 하는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닌가?

어떤 경우라도 틀림없는 사실은 내맘에 쏙드는 국민들만으로 나라를 구성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성향의 사람이 다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다. 싫거나 좋거나 함께 안고 가야할 국민들이다. 해방정국 때에도 그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번의 사태 결과에 따라 완전하게 정리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또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냥 또 그런 어중간한 상태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국민들의 관심을 비좁은 국내에서 와글와글하는 차원을 뛰어 넘어 '세계경영'이라는 큰 안목으로 열리게 하는 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우리 조상의 첫 나라라고 전해지는 고조선의 개국이념인 '홍익인간' 정신이 그 대안이 될 것이다. 나라를 살리고 지구촌의 화합과 번영을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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