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에 가면...
바뀌어 가는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자연속에서 민감하게 느끼기에 적합한 곳이다. 죽은듯 우두커니 서있던 겨울나무가 봄이 되면 저마다 다른 색깔과 때와 모양으로 잎과 꽃을 피운다. 녹음이 점차 짙어지면 모두가 짙푸른 녹색으로 색깔이 서로 비슷하게 되고 그 무성함은 끝이 없을 듯하다.

그러다가 시절인연이 닿으면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 무더위는 더이상 맥을 못추고 서늘한 바람 한줄기에 밀려나고 만다.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움은 이때가 적기이다. 비슷해 보이던 잎들이 제각각의 본 모습을 드러내며 변해간다. 조금 먼저 변하기도 하고 늦게까지 버티기도 한다. 결국은 다 떨어지겠지.

'떨어지는 단풍,
남아있는 단풍도
떨어질 단풍'

떨어질 단풍이기에 지금이 더욱 경이롭다. 직급이나 직책을 '나'로 삼아 애지중지 살아온 지난 날들이 모두 '한바탕의 짧은 꿈이었구나!'하고 깨어나는 날이 오기나 할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오늘을 전력투구, 완전연소로 흔적 남기지 않고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일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에덴에서 나간 적이 없었다.  악몽으로 거기가 바깥인줄 알고 살았다. 천지 이전에 이미 있었고 평생 돌고 돌아도 한발자국도 옮기지 않은 그 자리에서 오늘도 우리는 잠시 소풍나와 있다.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이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얽어매면 초라한 원두막,
풀어헤치면 광활하여 자유로운 들판'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나뭇잎의 색상, 그 속에 시간과 공간이 다 들어있다. 시간의 흐름이 바로 공간의 물질이구나 절감하게 해준다. 時空은 바로 하루하루 노랗게 빨갛게 물들어가는 단풍잎에서 하나가 되고 있다. 눈에 보이고 촉감으로 느껴지는 '시간'이 된다.

머지않아 고운 잎새를 하나 둘 떨구고 나면 나뭇잎 뒤에 숨어있던 본바탕이 드러나리라. 평생 여기저기 집착하며 살아온 그 모든 것들이 이제보니 하나도 잡히지 않는 지난일로 되어버린 우리들의 노년처럼 그렇게...

가을바람이 불면 부수적인 것들은 모두 떨어져나가고 그 앙상한 본체가 드러난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다.

운문선사에게 학인이 물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는 어떠합니까?”
“체로금풍-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연히 드러나지........”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면 本來面目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자체도 平常心이 아닐까? 다만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그 들뜬 마음에 따라나서지 않고 아무리 문이 여닫혀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쩌귀' 자리를 벗어나지 않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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